판결을 바꾼 세 글자

“부장님, 피고 은행 측이 증거로 제출한 내부 기안문서에 문제가 된 회사의 신용등급 란에 ‘N/A’라고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피고가 문제의 회사가 재무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숨기고 원고에게 투자를 권유했다는 점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황으로 보입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피고가 스스로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해 제출한 내부 기안문서의 한구석에서, 신용등급 불가를 의미하는 작은 표기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기록 중 단 한 페이지, 그것도 페이지 오른쪽 위 비고란에 적힌 세 글자였다.

조금만 대충 읽었더라면 그대로 지나쳤을 부분이었다.

“조사해보니 N/A는 기업이 신용평가를 공식적으로 의뢰하지 않았거나, 평가 체계상 등급을 부여할 수 없는 경우에 사용되는 표시였습니다.

문제가 된 회사는 투자 유치가 절실한 상황이었는데, 신용평가기관에 기업 정보를 제출해 등급을 ‘정상화’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투자를 받아야 하는 회사가 신용등급을 N/A 상태로 둔 채 투자를 받게 된 경위가 확인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해당 내용은 검토보고서에 자세히 기재했습니다.”

부장님은 잠시 생각하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런가요? 검토하느라 수고하셨어요, 서연구원님.”

잠시 후, 다시 나를 부른 부장님이 말씀하셨다.

“이 부분은 석명준비명령(상대방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공식적인 질문지)으로 정리해봅시다.”

그제서야 알았다.

내가 발견한 사소한 사실 하나가, 이 사건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원래는 좌배석 판사와 우배석 판사, 두 명의 법관이 사용하던 사무실이었다.

대칭으로 놓여 있던 두 개의 책상 사이, 어정쩡한 한구석에 책상 하나가 추가되었다.

그곳이 내 자리였다.

재판연구원.

보통은 ‘로클럭’이라고 불린다.

법관도 아니고, 법원 일반직 공무원도 아닌 존재.

사건 기록을 읽고, 쟁점을 정리하고, 관련 법과 판례, 학설을 조사해 판사가 올바른 판단에 이를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선발 시험에 합격했다는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리에 걸맞은 기여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출근길 마음은 늘 무거웠다.

새로 생긴 직군이었기에, 법관들도 일반직 직원들도 재판연구원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조심스러워 보였다.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던 말이 있었다.

“네가 작성한 검토보고서가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판사들은 너에게 일을 주지 않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었다.

판사 업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판사가 직접 검토하면 될 일을 굳이 번거롭게 재판연구원에게 맡길 이유는 없었다.



나는 서울고등법원 민사부 재판연구원으로 배치되었다.

주된 역할은 1심 판결의 위법 여부를 검토하는 일이었다.

이제 막 변호사 자격을 얻은 내가, 법학을 공부한 시간도 사건을 다뤄온 경험도 훨씬 많은 판사들이 작성한 판결문에서 잘못을 찾아내야 했다.

지금 생각해도 쉽게 납득되지는 않는 구조였다.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기록을 들여다보는 일은, 참빗으로 머리를 빗듯 한 줄 한 줄을 눈에 새기는 작업이었다.

기록을 큰 틀에서 보고, 다시 세부를 보고, 머릿속으로 사건의 이야기를 구성했다가 다시 기록으로 돌아오는 일을 반복했다.

재판연구원은 판결문을 쓰지 않는다.

내부 보고용인 검토보고서를 작성한다.

덕분에 문장을 다듬는 시간 대신, 기록을 읽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었다.

기록을 보고 또 보며 사건을 이해해 나가는 과정은,

대량 생산되는 기성복이 아니라 사건 하나를 위해 치수를 재고 다시 재는 맞춤 정장을 만드는 일 같았다.

그만큼 시간도 들고, 집중력도 요구됐다.

그렇게 발견한 작은 사실 하나로 1심 판결의 결론이 바뀌기도 했고,

이해되지 않는 지점을 찾아내 당사자들에게 설명을 요구하면서 재판의 진행 방향이 달라지기도 했다.



재판연구원은 판결문에 이름이 오르지 않는다.

그림자 같은 존재다.

하지만 초보 법률가 시절, 재판연구원으로 보낸 2년은 나에게 분명한 확신을 주었다.

법은 거대한 이론과 논리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판결을 바꾸는 것은 종종 기록 속에 숨어 있던 사소한 한 줄이라는 사실이다.



그 이후로 나는 사소해 보이는 문장 하나를 그냥 넘기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 시작이, 기록 속 ‘N/A’ 세 글자였다.

그 세 글자 덕분에,

1심에서 전부 패소했던 원고는 항소심에서 값진 일부 승소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일부 승소의 규모는 15억 원에 이르렀다.

사소해 보이는 세 글자가,

누군가의 삶을 바꾸는 순간이었다.

월요일 연재
이전 11화일곱번째 레몬 : 초보의 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