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가 피고에게 전달한 5억 원은
차용금일까, 투자금일까.
원고는 피고를 상대로 차용금 5억 원의 반환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원고가 제출한 증거는 통장 이체 내역과 당사자 사이의 약정서였다. 약정서에는 피고가 원고에게 매달 5억 원에 대해 일정 비율의 금원을 지급하기로 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원고의 주장은 분명했다.
이 금원은 차용금이고, 만기가 도래했으므로 피고는 원금을 반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피고의 주장은 달랐다.
5억 원은 회사에 대한 투자금이었고, 이익이 발생하지 않았으므로 투자금을 반환할 의무는 없다는 항변이었다.
실무에서 이런 유형의 분쟁은 드물지 않다.
돈을 주고받는 당시에는 서로의 신뢰를 전제로 거래가 이루어지고, 약정서에는 수익 지급 방식만 간략히 적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분쟁이 발생하면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이 돈의 법적 성격은 무엇인가.
설령 당사자 사이에서 ‘빌려준 돈’이라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었다 하더라도, 약정서에 그 취지가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다면 상대방은 언제든 말을 바꿀 수 있다. 그 순간부터 사건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입증의 문제가 된다.
이 사건에서도 1심 법원은 원고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은 해당 금원을 투자금으로 보았고, 원고가 회사의 재무 상태와 건전성을 인식한 상태에서 투자를 결정했다고 판단했다.
항소심을 준비하며 1심 판결의 판단 구조를 다시 검토하던 중, 피고 회사의 재무제표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회계 전문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자산관리공사에서 함께 근무했던 회계사 후배의 도움을 받아 재무제표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회계사 후배의 도움으로 재무제표상 특이점을 하나씩 확인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피고 회사의 대차대조표였다.
유동부채 비율이 유난히 높았다. 이는 만기 1년 이내에 상환해야 할 부채가 과도하게 많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회사의 재무 상태가 안정적이지 않아 장기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운 구조였음을 보여주는 지표였다.
이 점은 피고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재무 구조상 장기 투자를 유치할 여력이 없는 회사가, 원고로부터 5억 원의 투자금을 받았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약했다. 오히려 단기 자금 조달의 필요성이 더 강하게 드러났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검토보고서를 제출했고, 부장님은 조정기일에 당사자들의 직접 출석을 요청하셨다.
통상 변론기일에는 변호사들만 출석하고 당사자들은 법정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조정기일에서는 특별히 당사자들의 출석을 요구하셨다. 당사자의 태도와 반응이 사건의 실체를 드러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조정기일을 마친 뒤 부장님은 조용히 말씀하셨다.
“피고가 사실을 그대로 말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아.”
피고 회사의 대표는 원고를 제대로 마주 보지 못했고, 변호사를 통해 주장할 때 보이던 확신 있는 태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문서 속에서는 유지되던 논리가, 당사자 앞에서는 흔들리고 있었다.
대차대조표상의 숫자, 그리고 조정기일에서 드러난 피고의 태도.
그 두 가지가 맞물리면서 사건의 결론은 달라졌다.
항소심에서는 원고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고, 결국 원고 승소로 사건은 종결되었다.
사건을 뒤집은 것은 새로운 계약서도, 극적인 증거도 아니었다.
재무제표가 말해주는 구조와, 사람 앞에서 드러나는 미묘한 표정과 태도였다.
거짓말은 종종 기록보다 먼저 숫자와 얼굴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