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랬던 거군요


법정에서는 판사나 소송대리인, 검사가 많은 말을 한다. 그 중에서 들었을 때 가장 시원한 말은 판사가 “아… 그랬던 거군요”라고 말할 때이다.



판사는 사건과 아무 관련 없는 제3자이다. 당사자들의 분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당사자들의 주장을 듣고 사건을 이해하고 판결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 당사자가 아닌 제3자인 판사에게 복잡한 사건을 설명해서 사건의 내막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 변호사의 일이다. 변호사도, 판사도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사건을 서면과 당사자의 설명만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무척 골치 아픈 일이다.



법정마다 분위기가 다르다. 판사들마다 재판진행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판사의 인격과 개성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어떤 판사는 겸손하게 묻는다. 당연하다. 법학을 공부했다고 하더라도, 사법연수원에서 실무를 배웠다 하더라도 세상 만사 다양한 계약의 유형과 계약의 특징을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택시기사의 횡령이 문제될 경우 택시기사와 회사 간의 계약의 개별성과 특수성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겸손한 판사를 만날 때 나는 비교적 안심할 수 있다. 적어도 독단적으로 사실관계를 판단해서 잘못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다.



“아… 그랬던 거군요”는 판사의 의문이 해소되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변호사의 설명이 이해되었다는 것을 뜻하고 사건을 이해하는 데 막혔던 부분이 해소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 말 한마디로 안심할 수는 없지만 뭔가 막혔던 것이 뚫리는 느낌을 받는다.



아… 그랬던 거군요.



피고인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가던 중 역시 오토바이를 운전하던 피해자가 갑자기 진로방해를 하여 진입하는 바람에 피고인은 넘어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피해자는 20대 초반의 미술을 전공하는 미모의 여성이었다. 피해자는 자신의 오토바이를 세우지도 않고 그대로 가버렸고 피고인은 피해자에게 따지기 위해 피해자를 추격했는데 이 과정에서 피해자가 넘어져 무릎을 다쳤다. 검사는 피고인을 상해죄로 기소했다.


피고인은 자기는 뒤에서 피해자를 쫓아간 것뿐인데 피해자가 스스로 넘어졌다며 억울해했다. 사건 직전 피해자의 오토바이 뒤에 탔다가 내렸던 피해자의 지인이 검찰 측 증인으로 나왔다. 검찰이 신청한 증인이기에 피해자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변호인으로 신문을 하다 보니 검찰이 신청한 증인이 ‘피해자가 이 사건 사고 직전에도 사거리에서 신호를 무시하고 주행하다 넘어졌었다’는 취지의 증언이 나왔다.



이 증언이 나오기 전까지 이 사건은 어느 배달원이 20대 초반의 연약한 여성을 오토바이로 무리하게 뒤쫓아가 그 여성을 위협하여 겁에 질리게 했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뜻밖의 증인의 증언에서 피해자는 평소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고 무리하게 오토바이를 운전하던 것이었다.

검찰의 증인은 오히려 피고인을 위해 유리한 증언을 해주었다. 분위기가 바뀌었다.



재판장은 잠시 고개를 들었다. 메모하던 손이 멈추고, 증인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아… 그랬던 거군요.”



그 전까지 이 사건은 미모의 어린 미대생이

20대의 혈기왕성한 남성에게 쫓긴 사건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날 법정에서 드러난 것은

연약한 일방이 느낀 공포가 아니라,

반복된 무리한 운전과 위험한 습관이었다.



사건은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우리가 바라보는 방향이었다.

몇 개의 단어와 몇 장의 진술서만으로

사람은 쉽게 한 장면 속 인물로 고정된다.

‘젊은 배달원’, ‘미모의 미대생’, ‘추격’, ‘부상’.

이미 이야기는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법정은 그 속도를 늦추는 공간이다.

단정 대신 질문을,

추측 대신 설명을 요구한다.



“아… 그랬던 거군요.”

그 말은 단지 이해했다는 뜻이 아니다.

한 사람을 다시 보겠다는 신호다.

조금 더 듣겠다는 태도이고,

신중하게 판단하겠다는 선택이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한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기도 전에

이미 판결을 내려버리는지.



법정에서 내가 가장 기다리는 말은

승소가 아니다.

“아, 그랬던 거군요.”


그 말은

설명이 닿았다는 안도의 순간이고,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조금 더 이해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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