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은 왜 이렇게 어려운가

“물리학을 부전공했지만 사과가 만 번 내 눈앞에 떨어지는 것을 본다 한들, 나는 ‘왜 사과가 떨어질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었을까?”

“탕의 물이 넘쳐흐르는 것을 보고, 아르키메데스처럼 물이 흘러넘치는 이유를 묻는 질문을 할 수 있었을까?”

아이들 교육 정보를 얻기 위해 구독하는 수학 교육 채널에서 나온 이야기였다.
서울대에서 공학과 물리학을 전공한 진행자는 자신은 그런 질문을 하지 못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멈칫했다.


사과가 떨어지는 장면은 평범하다.
목욕탕의 물이 넘치는 장면도 평범하다.

하지만 그 평범함 속에 “왜?”를 붙인 사람은 역사를 바꾸었다.

아이작 뉴턴은 사과에서 중력을 보았고,
아르키메데스는 욕조에서 부력을 발견했다.

한 줄짜리 질문이 물리학의 기초를 세웠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질문하지 않을까.
아니, 질문하지 않는 걸까. 질문할 수 없는 걸까.

아이에게 물었다.

“이해 안 되는 게 있으면 선생님께 질문해도 되잖아.”

아이는 말했다.

수업을 멈추게 하는 것 같아서.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 같아서.
괜히 튀는 아이로 보일까 봐.

이해되지 않았어도 질문은 교실 문을 넘지 못했다.

나는 아이를 다그치지 못했다.
사실 나 역시 그 교실에서 자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점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나는 왜 그런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 단순한 문장이 왜 이렇게 어렵게 느껴질까.

혹시 우리는 오랫동안
성현의 말에 토를 다는 태도를 무례하다고 배워온 것은 아닐까.

빠르게 따라잡아야 했던 근대화의 시간 속에서 묻는 사람보다 외우는 사람이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혹은 “남들은 다 아는데 너만 모르니?”라는 보이지 않는 평가를 두려워해서는 아닐까.



로스쿨 1학년 때, 법학을 전혀 공부해 본 적 없는 이른바 ‘비법(非法)’끼리 스터디를 만든 적이 있다.
전공서를 읽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정리해 교수님께 질문하는 모임이었다.

그전까지 법학 공부의 전형은 수십 시간에 이르는 강의를 듣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의를 오래 들을수록 묘한 기분이 들었다.

수업을 들을 수록 설명을 하는 강사만 더 똑똑해지는 것 같은 느낌.



그래서 생각했다.

내가 이해되지 않는 지점을 질문하지 않으면
결국 나는 이해하지 못한 채 흉내만 내게 되지 않을까.

전공자라면 너무 당연해서 묻지 않았을 질문을 우리는 거리낌 없이 물었다.

그 질문 덕분에 우리는 빠르게 법학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질문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았고, 오히려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시간을 내어 답해주신 교수님들이 있었기에 그 질문은 사라지지 않을 수 있었다.

누구나 자유롭게 질문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나는 배움이 살아나는 순간을 경험했다.

그래서 요즘의 분위기가 더 아쉽다.



우리가 배우는 모든 이론은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대한 답의 형태로만 이론을 배우고 그 답을 낳은 질문은 배우지 않는다.

질문은 느리다.
정답은 빠르다.

질문은 흔들린다.
정답은 단단해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단단해 보이는 쪽을 선택하며 조금씩 질문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나는 아이에게 질문을 가르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법정에서도, 교실에서도, 삶에서도 나는 늘 정답보다 질문이 먼저라고 믿어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이에게 묻는다.

“오늘, 무슨 질문을 했니?”

그리고 아이가 신난 얼굴로
자기 질문을 꺼내놓는 날이 오기를
조용히, 그러나 간절히 바래본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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