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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렌스 May 08. 2018

내가 받고 싶은 금식은

이사야 58:1-14

내가 받고 싶은 금식은 이런 것들이 아니냐? 부당하게 묶인 사슬을 끌러 주고 멍에의 줄을 풀어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자유롭게 놓아주고 모든 멍에를 부숴 버리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고 가난한 노숙자를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냐? 헐벗은 사람을 보면 옷을 입혀 주고 네 혈육을 못 본 체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만 하면 네 빛이 새벽 동녘처럼 터져 나올 것이고 네 상처는 빨리 아물 것이다. 그리고 네 옳음을 밝혀 주실 분이 네 앞에 가시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서 보살펴 주실 것이다.


금식은 말 그대로 음식을 섭취하는 것을 중단하는 일이다. 

생명체가 영양분의 섭취를 멈춘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인간이 금식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통해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과 삶의 결과를 전부 하나님께 의탁하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에 그 목적이 있다. 


많은 정치인들이나 노조 조직 등이 대표적으로 '단식투쟁'이라는 방법을 사용한다. 

원하는 바를 상대방에게 관철시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논리이다. "이거 수용하던가, 안 하면 나 죽는다.'라는 논리로 많은 군중의 관심을 끌어당기고 상대에게 의사결정을 압박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금식의 목적은 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일을 나의 목숨을 담보로 하나님을 압박하고 팔을 꺾어 이루기 위함'이 금식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금식의 시간을 통해 식음을 전폐하고 나의 생명을 온전히 주님께 맡김을 되새깁니다. 이처럼, 내가 기도하는 이 일의 결과도 주님께 맡기니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겸손의 표현이 금식이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아의 죽음을 의미한다. 자아가 죽으면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임하신다. 

하나님이 임하시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순종의 삶이 시작된다. 

순종의 삶은 다름 아닌 이웃사랑의 삶이다. 

때문에, 참된 금식은 이웃사랑으로 연결된다. 


비단, 금식만 그런 것일까? 

재론의 여지없이, 금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금식을 안 할 때의 평소의 성도의 삶이다. 

금식의 의미를 되새김을 통해, 평소 성도의 삶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겸손의 모습이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철저히 겸손할 때 비로소 임재하신 하나님을 통해 주님을 기쁘게 하는 이웃사랑과 증거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금식의 의미를 되새김을 통해 자아가 죽은 겸손의 삶을 다시 깨닫게 하여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진정한 이웃사랑의 삶은 하나님 사랑으로 비롯되어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저의 삶이 예수님처럼 완전한 자아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을 대변하는 주님의 도구로 살아가게 붙잡아주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편지로, 그리스도의 향기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는 영생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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