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재, 세화 그리고 영실
눈물이 났다. 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다시 볼수 있을까?
오후 5시까지만 해도 비바람이 불었다. 노을은 커녕 붉은 빛깔 조금이라도 볼 수 있으면 천운이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5시가 넘어가자 거짓말처럼 맑아졌다. 약간 낀 구름이 방해가 되기보단 뭉글함을 만들어줬다.
나는 입버릇처럼 "그래도 바다는 세화바다지."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특별한 순간이 겹친 협재는 비교를 논할 것 없이 그 자체로 협재였다. 붉고(노을), 파랗고(하늘), 하얗고(모래), 검은(바위)색깔이 서로 어우러지면 그것만으로 꽉찬 순간이 된다. 모든 것들이 그리워지는 해질무렵이 다가오면 짙은 외로움도 질식될 정도로 완벽하다. 늘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비양도를 바라보며, '그래 협재구나' 고개를 끄덕끄덕 거렸다. 그 순간, 맑은 날에도 보기 힘들다는 온전한 석양이 구름을 뚫고 슬며시 존재를 드러냈다. 귓가엔 "hard to say I'm sorry"라는 노래가 흘러 나왔다. 태양이 지평선으로 사라질 때 딱, 노래가 끝이 났다. 형언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Hard to say I'm Sorry - Chicago)
https://www.youtube.com/watch?v=1A0MPWseJIE
나는 단호하게 말한다. 영실을 한 번도 안가본 사람이 있어도 한 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고.
사진에서 보다시피 이번 영실은 최악의 컨디션이었다.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길이었지만 묵묵히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런 영실에 처음 와본 자라면 '다시는 여기 안올꺼야'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진짜 영실을 익히 알고 있다. 영실에 10번 오면 보통 5번은 오늘 같이 남벽의 웅장한 광경을 보지 못하고 돌아선다. 날씨의 선택을 받아야 완벽한 영실과 남벽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에 오면 가장 먼저 안부를 묻는 곳은 영실이다. 청량한 날에는 제주도의 아름다운 모든 모습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영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50%의 확률을 쥐고 일단 가본다. 자연이 그 순간을 허락하는 순간 제주를 황홀하게 만끽하고 오롯한 충만감을 느낀다. 제주를 모두 다 가진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산길을 내려오며 제주도에 갈 때마다 영실을 오르내리는 나의 모습이 삶의 신념과 꿈을 향해 가는 과정과 흡사하다고 느꼈다. 살다보면 성공을, 때로는 실패를 맛보지만 내 마음속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빛나고 소중한 깊은 본질적 마음은 늘 있다. 꿈,소명, 신념, 가치 같은 것일 거다.
제주의 영실이 제주의 본질 같아서 매번 제주에 갈때마다 일단 두드려본다. 그렇게 수백번 두드리다 보면 한 번은 최고의 영실을 맛보게 된다. 하지만 삶의 대부분의 시간은 오늘처럼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마음 속에서 남벽, 백록담, 마라도까지 보이는 시야, 병풍바위를 상상하며 그 지지부진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간다. 언젠가는 최고의 영실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한편, 이런 날이면 내가 걸어가는 길 바로 옆에 있는 잎사귀, 바위, 초록 평원이 더 눈에 들어 온다. 도전하는 삶에 지쳐 있을 때는 주위를 둘러보고 잠시 관조하면 놓친 것들이 나를 또 위로해준다. 이번 제주가 그런 시간이었다.
영실이 오늘의 모습이었다고 해서 다음 영실을 포기할 수 없듯, 삶의 모습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터널을 가는 느낌이라도 꿈과 소망은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난 또 말한다. 영실을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