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보면 미얀마 양곤대학교 유학과정은 인생을 건 도박과도 같았다. 미얀마가 언제 미얀마 될지를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운이 좋게도 십년정도 기다린 끝에 미얀마가 민주화가 되어 양곤대 입학을 할 수 있었다. 준비기간동안 많은 꿈을 마음 속에 새기고 새겼다. 가장 큰 목표는 ‘한국-미얀마간의 징검다리’역할이었다. 큰 목표에서 의미가 부합하는 일이면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하고 싶었다. 가장 먼저 꿈꿨던 일은 ‘대한민국 대통령 순방 참여’였다. 그 외에는 ‘미얀마 정부 관계자 한국 순방시 동행하기’,’미얀마 다큐멘터리 제작 참여’, ‘미얀마 정재계 관계자들과 단단한 네트워킹’등 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미얀마 전문가는 한국과 미얀마간의 교류를 촉진할 수 있는 네트워킹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양측의 신뢰를 얻고 양국의 이해의 폭을 증진시키며 일이 될 수 있게 뒤에서 조력할 수 있는 전문가로 성장하고 싶었다. 미얀마에 유학 가기 전 한국에 미얀마에 관한 소식과 정보를 알리고 싶어서 ‘한-아세안센터 기자단’을 동국대학교 석사시절부터 꾸준히 했었다. 미얀마에 유학가서도 기자단 생활을 하면서 ‘한국-미얀마’간의 교류의 장이 열리면 학교 공부가 끝나 뒤에 취재를 나갔다.
때론 외교행사 취재, 경제행사 취재, 문화관련 행사취재를 다니면서 한국 대사관, 미얀마 정재계 관련자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6개월-1년동안 미얀마에서 꾸준히 활동하자 행사에서 봤던 분들을 또 보기도 하고 그들을 통해 네트워킹을 확장 해 나갔다. 미얀마 현지에서 공부와 함께 현장경험을 쌓는 것을 함께 병행했다. 행사 취재를 하면서 아주 의미 깊은 경험을 한 적도 있었다.
대한민국 대사관 네피도 공연 , 아웅산수찌 국가고문 깜짝방문
2018년 이상화 대사 부임이후, 미얀마-한국간의 교류가 굉장히 활발해졌다. 미얀마 문민정부 시기 첫 부임한 한국대사이기도 하고 워낙 열정적으로 일했기 때문에 양국간의 교류가 굉장히 활발했다. 미얀마 ‘네피도-양곤-만달레이’에서 대한민국 대사관이 한국 공연을 순례하여 개최한적이 있었다. 네피도, 양곤, 만달레이 공연 때 모두 만석을 이룰 정도로 아주 인기가 좋았다. 네피도는 미얀마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평소에는 한적한 도시로 유명하다. 행정인구만 대부분 거주하기 때문에 주말만 되면 양곤(미얀마 옛 수도)으로 돌아오는 공무원들이 꽤나 많았다. 그런 곳에서 몇 백명이 인사인해를 이루며 대한민국 대사관 네피도 공연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취재를 하기 전, 오늘 공연에 아웅산수찌 국가고문이 참석을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사실상 아웅산수찌 국가고문이 미얀마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미얀마 정상급이 대한민국 대사관 주최 공연에 참석한 거와 같다. 아웅산수찌 국가고문은 우리나라의 소프트 파워 ‘한류’를 굉장히 중요시 했다. 미얀마도 한국과 같이 소프트파워의 강국이 되길 원했다. 사실 미얀마는 독재정권이 이뤄지기 이전 ‘영화’ 산업이 굉장히 발달한 나라였디. 1920년대부터 영화를 제작했고 1960년대 이전까지 전국에 영화관이 400곳이 넘게 운영되고 있었다.
포토라인에 아웅산수찌 국가고문이 입장했고, 모두가 그녀의 진짜 방문에 깜짝 놀랐다. 더 놀라운건 1시간 가량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며 한국의 풍물공연을 집중해서 보았다. 다른 일정으로 인해서 끝까지 공연을 관람하지는 못 했지만, 1시간이라는 시간동안 아웅산수찌 국가고문은 미얀마 장관들과 나란히 앉아서 한국의 문화에 심취했다. 나중에 풍문으로 들어서 사실인지는 잘 모르지만, 한국 공연에 아웅산수찌 국가고문이 참석했다는 사실을 듣고 일본 대사관에서 몹시 부러워했다는 이야기를 일본 대사관 친구에게 전해들었다.
이 날 아웅산수찌 국가고문의 비서와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아웅산수찌 국가고문의 비서는 나에게 그녀가 한국문화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 지에 관해 열변을 토했다. 오늘도 바쁜 일정 속에서 한국 공연 참석을 하기 위해 다른 일정을 조정해서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뿌듯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녀는 한국의 K-pop에도 관심이 많았다. 미얀마 남자 아이돌 그룹 중 미얀마 M-pop에 K-pop을 가미하여 활동했던 ‘프로젝트-K’ 그룹이 있었다. 미얀마 노래에 케이팝을 가미한 그들을 그녀는 매우 좋아했고 미얀마 문화사업을 육성하기 위해 그들을 많이 응원했다. 2019년 한-아세안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회담 중 ‘프로젝트K’의 한국 K-pop연수를 공식적으로 부탁도 했고 회담의 결과로 그 그룹이 한국에서 정말 K-pop연수를 받고 돌아갔다.
2019년 대한민국 대통령 미얀마 국빈방문, 십 여년의 꿈이 이루어지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미얀마에 순방을 하면 수행을 하고 싶었던 것이 나의 꿈 중의 하나였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신남방정책을 펼치기 전까지 동남아시아의 아세안 국가들은 우리나라 외교에서 중점적인 국가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 대통령이 미얀마에 방문한다는 것은 매우 희박한 확률이었다. 그런데 아세안 국가가 중국을 견제할 국가로 부상하면서 우리나라 외교에서 4강외교 만큼 아세안이 중요해졌다.
미얀마에서 유학할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신남방정책’이 화두였고,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세안국가 10개를 국빈방문하며 회담을 진행했다. 2019년 9월3일-5일동안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문재인 대통령이 미얀마를 국빈방문했다. 국빈방문하기 몇 달 전부터 양곤은 매우 분주해졌다. 대통령 국빈방문 TF팀이 꾸려졌고, 대사관을 중심으로 코이카,코트라 그리고 관련 부처 파견자들을 비롯하여 매주 모여 주말까지 모두 반납하며 대통령 순방을 준비했다. 운이 좋게도 대한민국 김정숙 영부인의 '양곤외대 간담회' 사회를 맡게 되었다. 고등학생시절부터 꿈꾸던 대한민국 대통령 국빈방문 수행을 하는 날이 나에게 성큼 다가왔다.
설레는 마음도 잠시 하나의 실수라도 있으면 국빈방문 행사를 망칠 수도 있다는 중압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양곤외대의 협조를 구하는 일이었다. 양곤외대 총장님과 부총장님을 만나뵙고 대한민국 대통령의 국빈방문 일정과 양곤외대에서 진행 할 행사에 관해 설명했다. 다행히도 우리과 학장교수님과 양곤외대 총장님과 부총장님이 친한 사이여서, 교수님의 도움 덕분에 두 분을 편안하게 만나 부탁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영부인 간담회 행사에 참여할 한국어과에 재학중인 미얀마 학생들과 미얀마어과 재학중인 한국 학생들의 참여를 요청하고 확답을 받았다.
그 다음으로는 장소 셋팅을 했어야 했는데, 이 때 참 양국간의 문화적 차이로 여러번 행사장소의 형태가 변한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미얀마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일 경우 그에게 예의를 갖춘다는 의미로 행사장에서 가장 좋은 의자에 앉게 하는 문화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위치가 높아도 같은 의자에 앉아야지, 높은 사람만 다른 의자에 앉을 경우 다소 어색하거나 논란의 쟁점이 되기도 한다. 양곤외대 총장님과 부총장님을 비롯한 선생님들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영부인이 학생들과 같은 의자에 앉게 한다는 것을 매우 불편하게 생각했다. 한국측은 같은 의자에 앉아 둥그렇게 앉아 간담회를 진행하자고 했지만, 미얀마측에서는 극구 불편한 입장을 내세우며 안된다고 했다.
여러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총장님과 부총장님에게 한국과 미얀마 문화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며 한국측 입장대로 동그랗게 같은 책상과 의자에 앉아 소탈하게 대화하는 간담회 현장동선을 만들었다. 행사 당일날도 행사 시작전까지 긴박하게 수정되는 사항이 있었다. 양곤외대 행사장 로비에는 한국어과 학생들이 그린 작품들과 시들이 전시되었다.영부인께서는 학생들의 유창한 한국어실력으로 설명을 들으며 간담회가 이루어질 강당으로 입장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로 미얀마 학생, 한국 학생들은 열렬하게 대한민국 김정숙 영부인을 환호했다. 한국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고국에 대한 자부심이 그들의 박수소리에 묻어 나왔다고 생각한다. 양곤외대 미얀마어과 한국인 졸업생의 사례발표와 한국어과 미얀마 학생들의 한국에 관한 꿈과 도전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훈훈한 간담회를 마무리 하게 되었다. 예정보다 간담회가 빠르게 끝나고, 갑작스럽게 청와대 행정관님이 '질문 하나 사회자 분도 하셔도 되요.'라며 예정에 없던 시나리오를 던져주셨다.
십여년전부터 꿈꿔온국빈방문 수행역할도 가슴이 벅찬데, 행사진행에 직접 질문까지 할 기회가 오다니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떨리는 마음을 숨기고 마이크를 부여잡았다. “여사님, 오늘 사회를 맡은 양곤대 박사과정 최재희라고 합니다. 오늘 여사님을 마주 앉아 간담회를 진행하는 순간이 제가 오랫동안 꿈꿔온 꿈이 이루어진 날입니다. 고등학생때부터 꿈꿔오던 저의 꿈을 함께 이뤄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공부해서 한국과 미얀마간의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마지막 멘트와 함께 간담회는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여기서 또 잊지 못 할 나만의 추억이 있다. 보통 국빈방문 행사의 경우 모든 동선과 행동들의 가이드라인이 정해져있다.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않게 악수하는 사람, 꽃 주는 인물등을 미리 정해놓는다. 간담회를 끝나고 영부인이 퇴장을 할 때, 돌발적인 우연이 나에게 주어졌다. 양곤외대 행사를 최종 점검하던 청와대 행정관님이 입모양으로 '여사님이라고 불러요!'라며 나에게 사인을 줬다. 아무래도 내가 행사준비를 하면서 행사 끝나고 여사님과 사진을 단둘이 찍어 꿈이 이뤄진 순간을 간직하고 싶다던 나의 말을 잊지 않으셨던 것 같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지금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순간적으로 “여사님!!!” 이라고 크게 불렀고, 차를 타고 다음 일정을 수행하기 위해 이동하려던 여사님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사회 정말 잘 봤어요. 꿈을 꼭 이루길 바래요.” 라며 포옹을 하며 안아주셨다. 예정되어 있던 동선과 시나리오가 아니었기 때문에 관계자들이 모두 놀랐고, 나의 외침에 응답해준 여사님을 보고 당사자인 나는 가장 놀라서 끝나고 펑펑 울었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고등학생 때 “꿈이 뭐예요?”라는 질문에 종종 나는 “민주화된 미얀마에 우리나라 대통령이 국빈방문을 오면 수행하는게 제 꿈이에요.”라고 대답했다. 나의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꿈은 원래 꼭 이루어지라고 꾸는 건 아니니깐, 열심히 꿔.”, “그게 가능해?”라는 대답으로 나의 꿈을 불가능하다고 걱정해줬다.
하지만 나는 민주화가 된 미얀마에 한국인 처음으로 양곤대학교 박사과정 유학을 하면서 대한민국 국빈방문 중 영부인 행사의 사회를 수행했다. 마침내, 꿈은 현실이 되어 나의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대한민국 국경일 행사, 네피도에서 만난 미얀마 장관님들
미얀마 정재계, 학계와 관련된 네트워킹은 종이에 갇힌 미얀마 전문가가 아니라 나를 한 단계 발전시키고 미래의 단단한 연결고리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했다. 미얀마 NLD 원로의원인 양아버지의 배경, NLD 르네상스 경제연구소 거주지, 양곤대학교 박사과정 학생 그리고 민주평통 미얀마지회 청년위원이라는 신분이 미얀마측 인사들과 네트워킹을 할 때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빠르게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간혹 나에게 “부모님이 양곤에서 사업하세요?”라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다. 미얀마를 단 한 번도 가 본적도 없는 부모님 밑에서 미얀마와 관련된 인연을 스스로 만들어간 자신이 가끔은 뿌듯하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했다. 하나의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서 짧은 시간안에 나에 대한 어필을 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미얀마에 진출한 한국기업은 대부분 봉제와 관련된 회사가 많다. 한 번은 유명한 한국 기업 봉제 공장의 숨겨진 딸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아 곤혹을 치른적도 있었다.
대한민국 국경일 행사는 네피도 힐튼 호텔에서 개최되었다. 자동차로 약 5시간을 걸려 네피도에 도착하여 행사에 참여했다. NLD 정부의 장관님들은 민주화가 되기 이전부터 아는 미얀마분들과 건너 건너 아는 사이라서교류하기가 참 좋았다. 힘든 시절을 함께 고내한 사람들간의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끈끈함이 우리에게 존재했다. 여러 장관님들 중에서 미얀마 '우 페민(U Pe Myint)' 공보부 장관님과의 인연은 무척이나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다. 아웅산 수찌 국가고문의 측근 중 한 분으로 공보부 장관이 되기 이전 그는 미얀마에서 유명한 작가 중 한 명이었다.
한-아세안센터가 주최했던 '2019 한-아세안 트레인' 행사로 한국에 방문했을 때 한국 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한국 영화, 드라마, 음악의 발전에 대한 궁금증 뿐만 아니라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한-아세안 트레인으로 방문한 마지막 날 교보문고에 들려 책을 잔뜩 사서 미얀마로 돌아가던 장관님의 뒷모습을 잊을 수 없다. 특히 군부독재시절 전까지 매우 융성하게 발전했던 미얀마 영화산업이 한국 영화산업처럼 발전하길 바라는 마음 또한 컸다. 2021년 군부 쿠데타만 터지지 않았어도 한국의 문화산업을 배우기 위한 교류가 많았을 것으로 예상되어 더욱 아쉬움이 크다.
한-아세안 트레인때 한국의 매체와 인터뷰를 하여 기사가 그 다음날 아침에 나온적이 있다. 우페민 장관님은 달리는 열차 안에서 나를 조심스럽게 불러 '한국어로 된 기사를 읽고 싶은데, 미얀마어로 번역해서 줄 수 있어?'라는 부탁에 달리는 열차에서 내내 한국어로 된 기사를 미얀마어로 번역하여 급하게 드린 기억도 있다. 미얀마 양곤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민주정부를 이끌어 나가는 정계분들과의 끊임 없는 교류는 한-미얀마 전문가가 되기 위한 초석을 다지는 길 중에 하나였다. 특정 국가의 전문가가 되고 싶다면 페이퍼만 볼 것이 아니라 현지 정치인, 경제인, 문화인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반드시 교류해볼 것을 추천한다. 글 속에서 서술된 문장들이 얼마나 왜곡되고 축약되어 서술되어 있는지 금방 깨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