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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희 La Wun Choi Jan 08. 2024

제2장: 미얀마, 말 할 수 없는 첫 만남

 

 미얀마 사람들과 첫 만남 그리고 불교학과를 선택한 이유


우리나라는 고등학교 1학년이 되는 순간 대학교 입시에 모든 것이 초점이 맞춰진다. 아침 기상시간부터 취침시간 전까지 수능을 잘 보기 위한 3년간 만반의 준비가 시작된다. 중학교때 공부보단 동방신기 오빠들이 좋아 소위 덕질을 하느라 공부를 잘 하지 못 했다. 1학년 모의고사를 보고 들어갈 수 있는 대학교를 담임 선생님이 뽑아 줬는데 참담하고 참담했다. 그 때는 인서울을 입학하지 못 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던 시절이라 내 손에 쥐어진 대학교 이름을 보고 많이 울었다. 그 다음날부터 친구들과 대화 하는 시간도, 티비와 인터넷을 하는 일도 확연히 줄이고 공부만 했다. 휴일에도 도서관에 가서 다른 친구들에 비해 부족한 학습량을 줄여나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신경이 곤두서서 ‘공부’만 보일 때 외삼촌이 부천에 미얀마 사람들을 만나러 가자고 제안했다. 다른 친구들을 따라 잡는 것도 벅찼던 나에게 공부 이외의 다른 일은 죄를 짓는 일만 같았다. ‘ 삼촌~내가 가기 싫다는게 아니라, 지금 내 실력이 바닥이라 아무것도 못 하는데 부천을 주말에 간다는 건 죄짓는 일이야!!!’ 라고 삼촌을 향해 불안감을 토로했다. 그 때, ‘공부도 인생에 중요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세계적인 시각을 키우는 것도 공부야.’ 라며 나의 두 손을 잡고 인생이 바뀌는 순간으로 데려갔다. 


부천에 있는 미얀마 NLD 사무실에 올라가서 문을 여는 순간, 처음 느껴봤지만 익숙한 듯한 향기가 나의 코끝을 지나갔다. ‘밍글라바(Minglaba)’라며 큰 두 눈으로 나를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미얀마 분들을 만났다. 미얀마 간식과 차를 먹으면서 미얀마 민주화에 관해 2시간 정도 깊은 이야기를 경청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오랫동안 독재정권을 유지하는 미얀마 군부에 대적하고 민주화를 이룩하기 위해 한국으로 망명하여 해외의 연대를 독려하고 있다는 故네툰나잉 회장의 첫 마디가 아직까지도 잊혀 지질 않는다. 삼촌과 나 그리고 다른 지인들도 몇 명 같이 간 자리에 유독 미얀마 사람들은 나에게 ‘미얀마 사람이랑 비슷하다. 미얀마 유명한 배우를 닮았다. 미얀마에 꼭 놀러와라. 자주 만나자.’ 와 같이 따뜻한 관심과 말을 해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미얀마 사람들의 순수한 두 눈망울이 잊혀 지질 않았다. 따뜻한 눈빛과 말투 그리고 관심이 마음속으로 들어와 ‘미얀마’라는 나라가 궁금해졌다. 그 이후에도 대입시험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미얀마 행사가 있으면 공부는 잠시 접어두고 즐거운 마음으로 부천으로 향했다. 한국에 있는 미얀마 사람들에게 가장 큰 미얀마 행사 중 하나는 ‘미얀마 스님 법회’ 였다. 십 몇 년전에는 미얀마 유학생들보다 월등하게 근로자들이 많았다. 미얀마 국민들의 약 90프로가 불자(佛者)일 뿐만 아니라 어릴 때부터 불교문화 속에서 자라고 스님들의 법문을 많이 듣는다. 외로운 타향살이에서 그들에게 한국에서 작은 위안은 미얀마 스님이 직접 한국에 오셔서 미얀마 말로 법회를 해주는 거였다. 


고등학생 시절, 미얀마 큰 스님이 방문하셨을 때 미얀마 사람들의 초대를 받아 참석한 적이 있다. 수십 명의 미얀마 사람들이 공경하는 마음으로 큰 절을 하고 법문을 청해 듣는 모습을 통해 미얀마 국민들의 불심(佛心)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미얀마와 인연이 있다는 것을 다시 느낀 것은 미얀마 법회도 영향이 크다. 미얀마에서 21년도 쿠데타 이전까지 만해도 미얀마 국민과 정재계 인사들이 모두 존경하는 큰 스님 중이 었던 시따구(Sitagu) 큰 스님이 한국에 오셨을 때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친견하고 시따구 스님 최측근 신도들과 네트워크를 만들게 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상징이 양곤대학교 오리엔탈학과를 입학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얀마 스님 법회를 통해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미얀마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불교(佛敎)’를 이해하고 불교 영향을 받은 미얀마 문화를 마음으로 이해해야 그들과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날 이후 미얀마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대입준비는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로 정했고 마침내 2011년도에 입학하게 되었다. 


 불교, 미얀마와 중요한 연결고리 


사람들은 간혹 나에게 ‘왜 미얀마어과를 안 갔어요?’라고 물어본다. 언어를 잘 구사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 사람들의 가치관과 문화를 이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얀마어과를 선택하기 보다는 미얀마 문화의 중심이자 뿌리인 동국대학교 ‘불교학부’를 선택해서 진학했다. 또 누군가에게 묻는다. ‘같은 종교라는게 무슨 도움이 되요?’ 라는 말에 미얀마 불교 네트워크를 경험한 나로써는 ‘한 번 경험해 보셨어요?’라고 반문을 한다. 미얀마 사람들은 오랜 역사 속에서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소수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빼고 미얀마의 약 90%는 불자(佛者)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의 뱃속에서 스님들의 법문을 듣는다. 아침마다 스님들의 탁발을 위해 아침을 공양하며 주말에는 절에 가서 명상을 하고, 집집마다 부처님을 모셔놓은 작은 법당이 따로 있다. 


일어나면서부터 자기 전까지 부처님의 법과 함께 하는 미얀마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마음’을 굉장히 중요시 여긴다. 특히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마음’이 통하는 인연법을 느끼면 미얀마 사람들은 자신들의 친절함을 모두 내어준다. 반면 이런 것을 느끼지 못 하면 미얀마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미얀마 진출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미얀마에 진출 하려면, 전생에 인연이 있어야 한다.’ 라는 풍문이 돌만큼 어려운 나라이다. 미얀마에 인연이 있으면 안 될 일도 술술 풀리고, 타인의 도움을 받아 힘든 일도 자연스럽게 넘기게 되는 신기한 경험을 한 분들이 많다. 반면에 인연이 없는 분들은 되던 일도 갑자기 다른 일이 생겨 꼬여서 잘 되던 사업도 망해서 나가게 되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다. 그 때마다 ‘미얀마 진출은 정말 인연이 있어야 하는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연’을 잘 만들어서 미얀마 진출에 성공한 분들을 보면 , 한국인의 관점에서 미얀마를 바라 보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미얀마 사람들의 관점에서 생각해 그들의 마음을 얻었고, 인정받는 CEO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굉장히 드문 케이스이다. 대부분 미얀마 사람들의 문화와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 해 ‘기회의 땅 미얀마’에서 피눈물만 보고 돌아가신 분들이 많다. 유학생활을 하면서 많은 질문을 받았다. ‘미얀마에 진출하기 좋은 사업 아이템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을 받으면 항상 나는 ‘미얀마 사람들의 가치관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고 반대로 질문한다. 미얀마에서는 다른 나라에 비해 ‘아이템’만 좋다고 해서 물건이 잘 팔리지 않는다. 이미 미얀마 시장은 중국과 일본 상품이 선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한국 제품이라고만 해서 잘 팔리는 시기는 이미 지났기 때문이다. 


‘미얀마 사람들은 불교의 가치관이 커요. 미얀마 오셔서 그들의 삶을 한 번 보시고 제품 아이템을 선정하세요. 이것을 잘 파악하셔서 마케팅 하시고 네트워킹 하시면 적어도 망하시지는 않으실거예요.’ 라는 답변을 주었지만, 단 한 명도 이렇게 한 사람을 보지 못 했다. 단순히 ‘한국 제품’이라고 해서 미얀마에서 구매 욕구로 올라가지 않는다. 미얀마 사람들의 대부분이 불자여서, 불교의 가치관을 이해하고 마케팅 해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바로 ‘네트워킹’에 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사업에서도 이 부분은 정말 중요한데, 미얀마 사업 네트워킹을 잘 하고 싶다면 ‘절’로 가라고 이야기 해주고 싶다. 미얀마 재벌그룹을 비롯하여 중견기업, 스타트업을 하는 CEO들의 95%가 불자이다. 


21년도 미얀마 군부 쿠데타 이후, 미얀마의 고승으로 추앙받던 시따구 스님은 군부편으로 돌아서는 것을 보고 미얀마 사람들의 민심을 많이 잃었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미얀마 국민들에게는 아주 큰 스님이었다. 대학생 시절, 시따구 스님이 열었던 불교 컨퍼런스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 때가서 미얀마 외교와 경제 그리고 정치가들이 시따구 큰 스님을 모두 존경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얀마에서는 불교의 보시가 일상생활이 돼서 현대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기부문화’가 발달했다. 스님의 불교 컨퍼런스를 위해 미얀마의 중견 건설기업의 호텔 방 기부, 군부측의 비행기 기부, 각 미얀마 기업가들의 음식 기부, 행사 진행 자원봉사등 각계 각층의 주요한 인물들과 네트워킹할 수 있는 소중한 자리였다. 그 때 들었던 생각은 내가 학생이 아니라, 미얀마에 진출하고 싶었던 사업가라면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과 네트워킹을 하고 싶어서 공식적인 이메일을 보내거나, 다른 사람들을 통해 네트워킹을 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더 강력하게 그들과 관계를 쌓는 것은 자신이 연결이 되고 싶은 기업의 오너가 다니는 ‘절’을 파악하는 것이다. 미얀마에서는 스님을 공경하고 모시는 일이 굉장히 중요하고 자신들의 삶에 행운을 불러다 준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가와 정치가 일수록 더욱 특별하게 모시는 스님이 있다. 미얀마 사람들이 믿는 불교 가치관을 이해하고 특별한 네트워킹을 하고 싶다면 그들의 삶과 가치관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절’과 인연을 맺는다면 미얀마 진출의 쓴맛은 적어도 보지 않을 것이다. 


 미얀마 민주화의 어머니, 아웅산수찌 국가고문을 한국에서 만나다.


‘미얀마 전문가’가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건 고등학생 때, 그리고 더욱 더 확고해진 계기는 한국에서 아웅산수찌(Daw Aung San Suu Kyi) 국가고문을 만나고 나서이다. 2013년 1월 그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 광주 5.18 국립묘지에 기념식수를 했다. 그리고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광주명예시민증을 받는 일정이 있었다. 운이 좋게도 광주 일정을 함께 할 기회를 얻었다. 빠듯한 일정이었고, 한국에 있는 많은 미얀마 국민들이 그를 만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짧게라도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어 그 날을 기념하고 싶었다. 자신의 인생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는 인생에서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얀마 국민들이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지도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면 미얀마 전문가로서 미얀마의 민심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얀마와의 알 수 없는 인연이었을까? 아웅산수찌 국가고문님은 광주 컨벤션센터 일정을 하던 중, 잠시 멈추고 반갑다며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눠주셨다. ‘미얀마 전문가가 되고 싶어요.’ 라는 말에 ‘꼭 열심히 공부해서 되어주세요.’라는 환답을 받았다. 그 때의 짧지만 강렬했던 순간을 십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를 처음 봤을 때 다른 정치인들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오랜 가택연금 시절 명상과 경전 독송을 하루도 빠짐없이 해서 그런지 수행자와 같은 종교인의 분위기도 풍겼다. 마른 체구였지만 맑고 청아한 눈빛에 자신감 있는 몸짓과 단아하고 힘있는 목소리는 만나는 사람을 압도하는 에너지였다. 


그가 가는 자리마다 인사인해의 미얀마 인파를 볼 수가 있었다. 미얀마 국민들은 그에게 “메쑤(Me Suu, 수지 어머니) 짠마바세(건강하세요.)” 라는 단어를 외치며 끝없는 환호와 지지를 보였다. 한국에서는 미얀마의 불교 문화를 알지 못하고 ‘독재자 찬양’이라는 프레임으로 잘못 보도를 하기도 한다. 미얀마에서는 ‘부처님, 부처님 법, 승가’ 이외에 중요한 것이 부모님과 선생님이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좁은 의미로는 정말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이지만 넓은 의미로는 인생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에게 부모님과 선생님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이들에게는 정말 자신의 부모님과 선생님과와 같은 존경심과 사랑을 보낸다. 미얀마 국민들에게 아웅산수찌 국가고문은 아웅산 장군의 딸이라는 단순한 대의명분으로 지지와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니다. 


아웅산 장군의 아들은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미얀마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 그가 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미얀마 국민들이 단순히 아웅산수찌 국가고문이 아웅산 장군의 딸이라서 지지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미국에 있는 아웅산 장군의 아들에게도 같은 지지를 보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미얀마 문화를 알면 단순한 맹목적인 ‘민주화 어머니 우상화’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013년 광주에서 처음 만난 그와 만남 덕분에 나의 꿈과 의지는 더욱 확고해졌고 누구보다도 미얀마 민주화가 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아웅산수찌 국가고문의 정치적 후원자 바바 우틴우 장군과의 만남 그리고 미얀마 양아버지가 생기다. 


2015년도 고양시 차세대 글로벌네트워크에 뽑혀 베트남을 가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고양시 차세대 글로벌네트워크는 고양시에 거주하는 청소년, 대학생들이 국제적인 시야를 갖고 꿈을 키우기 위해 해외로 가는 연수 프로그램이었다. 2015년도에는 베트남을 가게 되었는데, 준비하는 과정에서 당시 고양시장이었던 (前)최성 고양시장이 베트남과 함께 미얀마를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단순 미얀마 방문이 아니라 미얀마의 민주화 인사를 만나는 것을 추진 중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워낙 미얀마에 관한 정보도 없었던 찰나에 꾸준히 미얀마 NLD와 인연이 있던 나에게 민주화 인사분을 연결해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다. 


2015년 11월 총선 이후 아웅산수찌 국가고문은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해서 아쉽게도 만남은 성사되지 못 했다. 아웅산수찌 국가고문을 대신해서 만날 민주화 인물과 고양시 시장님과의 만남을 성사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고양시에서 4대째 넘게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나에게, 고향의 시장님과 미얀마 민주화의 인물과의 만남 성사는 무척이나 소중하고 귀중한 일이었다. 미얀마 한국 NLD 분에게 강력하게 부탁을 했고, 아웅산수찌 국가고문이 자신의 삼촌과 같이 믿고 의지하는 NLD의 원로의원인 우틴우(U Tin Oo)의원관의 만남이 성사 되었다.

 

고양시 차세대 글로벌 네트워크 연수에 뽑힌 학생들은 베트남 연수만 가는 일정이었다. 미얀마 NLD 원로의원과의 만남에 관한 중간 역할을 했기 때문에 베트남 연수 중에 前 최성 고양시장의 미얀마 일정에 맞춰서 미얀마로 넘어가게 되었다. 우틴우 의원은 군인 출신이다.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 자신의 위치를 내려놓고, 아웅산수찌 국가고문과 함께 미얀마 민주화를 헌신적으로 이끈 인물 중에 한명이다. 아웅산수찌 국가고문 만큼은 아니지만, 미얀마 국민들 사이에서 우틴우 의원에 관한 지지와 존경심 또한 상당하다. 아웅산 수찌는 당선된 이후에도 몸이 불편해진 우틴우 의원을 자주 찾아 뵙고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틴우 의원과 고양시장과의 회담을 끝내고, 준비했던 미얀마 편지를 전달했고 미얀마 문화 중의 하나인 가도(Gado)를 올렸다. 미얀마에서 가도는 부처님에게 절을 하는 것처럼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에게 절을 올리는 문화이다. 미얀마 문화를 알고 있는 나에게 큰 감동을 하셨고, 미얀마에 유학오면 자주 보자는 덕담도 해주셨다. 이 만남을 계기로 우틴우 장군과 함께 배석했던 우틴우 장군님의 비서인 또 다른 NLD 원로의원급인 우써인(U Seo Win)의원과 연락이 닿게 되었다. 미얀마 양곤대학교로 유학오게 되면, 자신이 운영하는 NLD 경제연구소인 르네상스 연구소(Renaissance Institute)에서 지내면서 미얀마 유학생활을 해도 된다는 제안을 받았다. 2016년도 미얀마 NLD 원로의원과 고양시 시장과의 만남을 주선했던 작은 씨앗이, 2018년도에 미얀마에 유학하면서 현실이 되어 유학생활을 NLD 경제연구소인 르네상스 연구소(Renaissance Institute)에서 하게 되는 영광을 누렸다. 


험난했던 미얀마 양곤대학교 유학준비 과정: 길이 없다면 길을 만들어라! 


 미얀마는 2015년 총선을 거치고 나서 민주화를 이룩했다. 민주화를 이룩하고 나서는 동국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미얀마 유학을 갈 수가 없었다. 2017년도에 석사 학위를 수여 받고 약 1년동안 미얀마 양곤대 유학준비와 포스코 청암재단 장학금 준비를 함께 진행했다. 미얀마 양곤대 유학준비는 정말 쉽지 않았다. 우선 학부생 자격으로 미얀마 유학을 갈 수 있는 건 부산외대 미얀마어과 학생들의 단기 어학연수와 양곤외국어대학교에 새로 입학하는 정보만 있었다. 그 이후에 석사와 박사과정 입학에 관한 정보는 우리나라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미얀마 양곤대학교는 외국인을 박사과정생으로 받아주지 않는다.” 라는 흉흉한 소문의 글만 발견하여 사기가 꺾인 일만 생겼다. 


우선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미얀마 양곤대학교에 전화를 걸어 동국대 불교학부 전공을 인정받으며 박사과정에 입학 할 수 있는 과를 찾는 것이 었다. 오랜 군부정권 이후 다시 학교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아 양곤대학교 홈페이지는 매우 낙후되어 있었다. (현재는 미얀마 문민정부시기 리뉴얼된 양곤대학교 홈페이지가 있음) 홈페이지에는 양곤대의 학과와 학과 번호와 이메일만 찾을 수 있었다. 다른 과들은 접전이 없었으나, 빨리어와 산스크리트어 그리고 미얀마 불교문화에 관한 커리큘럼이 있는 오리엔탈학과를 발견했다. 양곤대학교 오리엔탈학과에 전화를 하였으나 연결된 이후 바로 끊기고, 이메일에는 수 개월동안 답장이 없었다. 인터넷에서 봤던 ‘양곤대학교는 외국인 학생을 받지 않는다.’ 라는 글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작은 이유로 나의 유학길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한국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동원했지만, 얻을 수 있는 결과가 없었기 때문에 무작정 비행기 티켓을 끊고 양곤으로 향했다. 미얀마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굉장히 강하다. 미얀마 양곤대학교 오리엔탈학과에 찾아가 입학상담을 문의 할 때는 영어를 사용하기 보다는 미얀마어 통역을 함께 데려가는 것이 학과장 교수님 마음에 더 들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친구와 함께 양곤대학교를 들어가서 여기저기를 헤매며 30분이 지나서야 오리엔탈학과가 있는 건물을 발견했다. 


미얀마에서 학과장-교수, 교수-학생과의 관계는 매우 평화로롭고 좋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수직적인 구조로 빚춰질 수 있다. 미얀마 사람들은 자신에게 인생의 지혜와 가르침을 주는 선생님을 스님들과 같이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선생님을 만나면 스님과 같은 가르침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반면 나쁜 선생님을 만나면 권위주의의 끝판왕이 될 수 있는 어려운 부분도 있다. 오리엔탈학과에 처음 방문햇을 당시의 학과장님은 자신의 권위를 매우 중시하고, 자존심이 정말 강하신 분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신경을 거슬리게 하면 양곤대학교 입학이 어려울 거라는 본능적인 직감이 들었다.


우선 학과에 들어가자마자 한국에서 연락이 안 되었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학교에 초고속 인터넷망이 모두 설치되어 있고,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모두 개인 노트북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학교에 에어콘이 없는 경우는 상상할 수도 없다. 미얀마와 오랫동안 교류를 하며 미얀마 사정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은 나의 오만이었다. 학과에는 학과 공식 컴퓨터는 딱 한 대였고 그 이외에는 학과장 교수님 노트북 하나였다. 하지만 인터넷이 되는 것은 학과 공식 컴퓨터 하나였다. 학교에 와이파이가 설치는 되어 있었지만 신호가 약해서 와이파이 이용을 할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제일 충격이었던 것은 에어콘이 학과 교실에는 한 대도 설치되어 있지 않고 오래된 선풍기로만 더위를 이겨낼 수 있는 구조였다. 에어콘은 오직 학과장님실에 딱 한 대만 있었다. 


미얀마를 잘 안다는 나의 오만이 와장창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학과장님과의 만남을 위해 30분을 기다려서 대면할 수 있었다. 무표정한 교수님의 표정은 순간 나를 당황하게 했지만 ‘미얀마와 나는 인연이 있다.’라는 문장을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교수님의 첫 질문은 ‘미얀마 양곤대학교에서 무슨 연구를 하고 싶어?’라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나는 자신있게 대답을 했다. ‘어린 시절 미얀마 민주화 운동을 하던 분들과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분들과 교류를 하면서 미얀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를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대승불교를 공부했습니다. 미얀마 민주화가 되었으니깐 미얀마에서 미얀마 불교 문화 역사를 공부해서 미얀마 불교문화가 가장 융성하게 꽃피웠던 바간왕조에 관한 논문을 쓰고 싶습니다.’라고 답변을 했다. 


무표정했던 교수님의 표정은 점점 밝아졌고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미얀마 스님들 중에 법문을 들어본 스님이 있어?’ 라는 질문 또한 나에게는 행운이 가득한 질문이엇다. ‘한국에서 미얀마에서 가장 유명한 스님 중의 한 분인 시따구 스님을 친견하고 법문을 들어 본적이 있었습니다. 미얀마어 실력이 부족해서 스님 법문을 모두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중에 한국말을 잘 하는 미얀마분에게 어떤 내용인지 듣고 바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스님께서 개최한 불교 컨퍼런스에도 한국인 학생으로 참가한적이 있습니다.’라고 하며 스님과 함께 찍었던 사진들을 보여드렸다. 


미얀마 국민들이라면 누구나도 존경했던 큰 스님이었기 때문에 스님의 손이 내 머리위에 올라가고 합장한 사진을 보자마자 교수님은 정서적으로 무장해제가 되셨다. 그 이후에 양곤대학교 입학하기 위해서 준비해야 하는 과정에 대해서 상세하게 이야기 해주셨다. 입학시험을 위해서는 전공시험과 영어시험을 봐야하는데, 전공시험을 위해 읽어야 할 텍스트들도 자세하게 알려주셨다. 교수님과의 첫 만남 이후에도 2번정도 더 시험 전에 미얀마 양곤대학교에 방문하여 시험 준비를 했다. 입학시험을 보기 한 달 전에는 미얀마 호텔에 박혀서 공부만 하면서 시험을 위한 공부를 했다. 그 때 입학시험을 위해 쓴 펜인 15자루였다. 후회없이 공부를 한 후 운이 좋게도 양곤대학교 오리엔탈학과에 한국인 최초로 입학을 할 수 있었다. 


입학과 동시에 포스코 청암재단 장학생 준비도 했어야 했다. 포스코 청암재단에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아시아지역문가양성’ 장학금이 있었다. 아시아로 유학가는 석박사 학생들에게 장학금과 생활비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대학생 때 ‘미얀마 유학생활을 할 때 청암재단 장학금을 받고 가면 정말 좋겠다.’ 라는 꿈을 꾼적이 있었다. 드디어 마음 속에 품던 꿈을 실현할 기회가 주어졌다. 양곤대학교 입학허가서와 함께 포스코에 서류를 제출했고, 1차 합격 그리고 면접을 보는 기회가 주어졌다. 면접을 잘 보지 못 한 불안한 마음에 합격발표날만을 기다렸고 확인 후 ‘합격’이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눈물을 펑펑 흘렸다. 포스코 청암재단에서는 한 번도 양곤대학교에 유학가는 한국인을 지원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지원하는 사람도 없었고, 지원한다고 하더라도 외국인이라는 심리적 진입장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길이 없던 양곤대학교 입학과 포스코 청암재단 장학금 이라는 길에 길을 만들었고 무사히 원하던 유학 길을 떠날 수 있었다. 


 미얀마 양곤의 신데렐라가 된 사연: 미얀마 NLD Renaissance Institute 유학생활


양곤대학교 유학생활은 ‘미얀마 전문가’가 되기 위한 중요한 초석이었다. 우리나라의 수재들이 모이는 곳이 서울대학교라면, 미얀마에서는 양곤대학교였다. 미얀마 사람들은 양곤대학교 학생이 아니더라도 양곤대를 무척이나 사랑한다. 미얀마 양곤대학교 학생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졸업에 맞춰서 학사모를 쓰고 사진사를 동반해서 양곤대학교에 방문하여 졸업사진을 찍는 특별한 문화가 있다. 일년내내 전국에서 오는 졸업생들로 양곤대학교 교정은 늘 붐볐다. 미얀마 모든 국민들의 자부심이자, 자랑의 원천인 양곤대학교 박사과정 학생으로써의 유학생활은 곧 나에게도 그들의 감정을 오롯이 느끼게 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양곤에서 나의 생활의 터전은 우틴우 장군을 만날 때 함께 만난 우써윈 NLD의원이 운영하고 관리하는 르네상스 연구소(Renaissance Institute)였다. 2층의 단독주택 건물을 연구소 사무실로 쓰던 곳이었다. 1층과 2층은 사무실이었고 그 중 한 공간이 미얀마 언니 2명 연구원과 나의 숙소였다. 이 연구소에서는 해외의 기관에서 펀딩을 받아 미얀마 경제전망에 대한 전략 보고서를 서술하기도 했고, 우리나라 ODA 사업의 일환으로 KDI를 본떠 미얀마 MDI를 만드는 사업에 관해 깊게 관여하는 곳이었다. 일본, 중국 대사관에서도 미얀마 경제를 논의하기 위해 자주 방문하는 연구소 중에 한 곳이었다. 간혹 학교를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집 밖에 일본, 중국 깃발이 꽂혀있는 차량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집 앞에 차가 5대 정도 서 있는 날이면 미얀마 상무부 장관님이 양곤에 회의를 하시러 연구소에 도착한 날이었다. 상무부 장관님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이 “우리 집에서는 한국 드라마가 아주 인기가 좋아!” 라는 말을 할 때마다 한국의 소프트 파워에 관한 힘을 느끼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미얀마에서는 아직도 여자들은 술을 잘 먹지 않고 , 6시-7시 정도면 집에 귀가해서 가족들이랑 시간을 함께 보낸다. 한국에서는 저녁을 먹고 뒷풀이를 하면 집에 12시, 1시에 귀가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데 미얀마 가정에서는 부모님을 걱정시키게 하는 큰 일 중의 하나였다. 처음에는 이런 문화를 제대로 모르고, 한국 대사관 행사가 끝나고 밤 10시에 집에 도착해서 초인종을 눌렀는데 언니들이 화가나서 문을 열어주지 않은 날도 있었다. 결국은 이 사건 때문에 미얀마 양아버지와 언니들간의 긴급회의가 열려서 나의 통금시간을 논하는 일도 있었다. 


20살 후반인 나에게 다시 고등학생때처럼 통금이 있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청천벽력 같았지만 ‘로마에 왔으면 로마 법을 따르라’ 라는 격언처럼 미얀마 집의 규칙을 따르게 되었다. 학교 끝나고 6시까지 귀가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대한민국 대사관 행사, 민주평통 행사등과 같이 공식적인 행사가 있으면 미얀마 양아버지와 언니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고 10시까지 귀가해야 했다. 그래서 몇 안되는 한국 친구들 사이에서 나의 별명은 ‘양곤 신데렐라’였다. 2년 반의 유학 생활동안 미얀마 양아버지와 언니들의 넘치는 관심과 애정을 받으며 외롭지 않은 유학생활을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누군가가 나를 걱정해주고 기다린다는 일이 타지(他地)에서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너가 왜 거기서 나와?’ : 우리나라, 동북아시아 외교관들과의 만남 

 교수님의 출장으로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 있었다. 전 날 수업과 관련된 논문을 읽다가 늦게 잠들었고 아침에 늦잠을 자고 있었다. 아침 10시정도에 일을 하고 있던 언니들이 나를 다급하게 깨웠다. “라온!!일어나!! 미얀마 아버지가 내려오래. 한국 대사관에서 너를 보고 싶어한대.” 라며 나를 흔들어 깨었고, 아버지의 호출이기에 다급하게 세수와 양치만 하고 잠옷차림으로 내려갔다. 아버지 사무실 문을 열었는데, 한국인이 앉아 있었다. 그 분은 나를 보고 매우 놀래서 “한국분이세요?”라는 한국말로 첫 인사를 건넸다. 미얀마 아버지는 웃으면서 대한민국 대사관의 근무하는 서기관인데, 자신과 몇 년전부터 친분이 있어서 간혹 연구소에 놀러온다는 이야기를 나에게 건넸다. 


“네, 안녕하세요! 양곤대학교 박사과정을 하고 있습니다.” 라고 건네자 “여기서 근무하세요?” 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니요. 저는 우써윈 아버지의 한국인 수양딸이예요. 양곤대학교 유학생활 할 때 여기서 언니들이랑 지내라고 해서 거주지가 여기예요!” 라는 말에 그 분의 눈은 한 번 더 동그래지셨다. 서기관님은 간혹 양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연구소에 방문한다고 했다. “한국인 딸이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사시는 줄은 몰랐네요. 반가워요! 앞으로 종종 놀러오면 인사할께요!” 라며 그는 다시 유창한 미얀마어로 양아버지와 미팅을 이어갔다. 한국인으로써 미얀마에서의 유학생활 자체만으로 한국인의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나에게는 미얀마 여당(NLD)의원인 양아버지의 한국인 수양딸이라는 타이틀로 인해 더욱 더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미얀마 유학생활을 했었다. 


르네상스 연구소에서 2년 반동안 지내면서, 연구소에는 우리나라 대사관 서기관 이외에도 중국, 일본, 영국등 다양한 나라의 외교관과 전문가들이 찾아와서 회의를 하는 것을 참 많이 보았다. ‘정치외교’를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미얀마 정치외교의 한 중심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특히 동북아시아 외교관들을 연구소에서 만날 때는 특히 더 조심했다. 미얀마-일본, 미얀마-중국 간의 특별한 회의 일 경우에는 일본측과 중국측에서 내가 있는 것을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런 경우에는 눈치껏 방으로 돌아가 학과 공부를 하거나 미얀마 공부를 하며 회의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우리나라는 미얀마 민주화 라인과는 민주정부 이전까지는 직접적인 인연이 없었기 때문에 민주정부에서 ‘누가’ 중요한 인물인지 파악하는 작업이 중국과 일본에 비해 늦었다. 중국과 일본은 군부정권, 민주정권을 가리지 않고 중요 인물과의 네트워킹이 잘 되있었다. 그리고 우수한 인재들을 본인들 국가의 우수한 대학에 초청 장학생으로 데려가서, 친중과 친일의 가까운 미얀마 차세대 리더들을 길러내는 것을 보고 속으로 혼자 많이 안타까웠다. 또한 미얀마 민주정부에 투자하는 ODA규모도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큰 규모였고, 꾸준하게 지원하는 편이었다. 


미얀마 민주정부 라인에서는 반대로 대한민국을 롤모델로 삼아 많은 교류를 원했지만, 한국과 접점이 없어서 많이 아쉬워했다. 암흑 같던 미얀마 민주정부 라인과의 네트워크는 미얀마 민주정부시기 부임했던 이상화 대사가 정말 잘했다. 네피도에 있는 장차관부터 양곤에 있는 민주정부 핵심인물들까지 두루 살펴가며 주중과 주말을 쉬지 않으며 그들과 대면교류를 했다. 나중에는 반대로 미얀마 상무부 장관, 미얀마 기업 회장, 경제 연구소 이사장님들이 ‘한국 대사 정말 일 열심히 하더라, 대단해!’ 라며 나에게 한국 대사님에 관하여 칭찬을 할 정도였다. 미얀마에서 성공을 하고 싶다면, 그들과 자주 만나고 진심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면 보이지 않던 미얀마의 문이 자연스럽게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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