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재판장님, 본 변호인은….”
우리가 흔히 보는 드라마 속 변호사의 모습이다. 나 역시 변호사가 되기 전에는 모두들 법정에서 이렇게 변호하는 줄 알았다. 그러면서 법정에서 멋진 변론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변호사는 말을 많이 할까, 글을 많이 쓸까. 둘 다 많이 하긴 하지만 내가 보기엔 글을 훨씬 더 많이 쓰는 것 같다. 변호사가 되고 보니 법정에서 말을 하는 시간보다 모니터 앞에 앉아 글을 쓰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았다. 몇 천 페이지가 넘는 기록을 읽고 서면을 쓰다 새벽을 맞이하기도 했다. 글 쓰지 않는 시간에는 의뢰인과 상담을 하고 기록을 읽었는데, 이것도 결국 서면을 쓰기 위해서였다.
공판중심주의, 구두변론주의라는 말이 있다. 모든 증거는 공판에 집중시켜 법원에서 형성된 심증만을 토대로 심판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공판중심주의는 구두변론주의를 전제로 한다. 즉, 법정 안에서 말로 싸우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실제로는 어떨까. 민사소송의 경우 재판에 나가 “4월 11일자 제출한 준비서면을 진술하겠다”고 하면 이미 제출한 서면을 말로 한 게 된다. 그러고 나서 원고와 피고의 변호사들은 각자 작성한 서면에서 핵심 주장에 대해서만 간략히 언급하는 정도의 말을 한다. 판사는 더 제출할 증거나 서면이 없는지를 확인하고 다음 재판 날짜를 정한다. 형사소송이라고 해서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증인을 부르지 않는 한 대부분의 재판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서면과 증거를 재판 전에 미리 제출하고 그것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한다. 조금 말을 길게 한다 싶으면 판사는 이렇게 말한다. “서면으로 제출하세요.” 그래서 아무리 언변이 뛰어난 변호사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글로 판가름 된다.
지방재판이라도 있는 날엔 꼭두새벽같이 일어나서 KTX에 몸을 실어야 한다. 법원에 가는 데만 족히 너덧 시간이 걸리는 대장정 끝에 판사 앞에 서는 시간은 고작 단 10분이 전부다. 처음에는 재판이 원래 이런 건가 싶어 허탈하기도 했다. 내려간 김에 근처 사는 지인들을 만나거나 식사라도 하고 오면 좋겠다 싶지만 변호사가 그럴 여유 부릴 입장은 못된다. 그래서 이런 경우 변호사들은 ‘복대리’를 종종 이용한다. 복대리인은 변호사가 선임하지만 변호사의 대리인은 아니다. 의뢰인이 기존에 선임한 변호사와 마찬가지로 의뢰인의 대리인이다. 재판 시간이 겹치거나 지방 재판의 경우처럼 변호사가 직접 재판에 가기 힘들 때 복대리인인 변호사를 대신 참석시켜 재판을 진행한다. 형사 재판을 제외하고는 복대리가 가능하다.
재판에 늘 함께 갔던 우리측 의뢰인은 내게 “상대 측은 변호사가 매번 바뀌네요. 너무 소홀한 것 같아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의뢰인이 보기에는 복대리 제도가 탐탐치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서면마저도 대신 써주는 변호사가 있다는 걸 안다면 어떨까? 재판에 복대리인을 보냈다고 해서 변호사가 그 사건을 소홀하게 생각하는 건 절대 아니다. 나는 10분 남짓한 재판이라도 담당 변호사가 직접 나가는 게 의뢰인 입장에서 변호사를 신뢰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직접 법정에 나가는 걸 원칙으로 하고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복대리를 쓴다. 그리고 서면만큼은 대리를 쓰지 않고 직접 쓴다.
변호사는 대필가가 아니다.
처음 이혼사건을 맡았을 때의 일이다. 나는 바람을 피운 유책 배우자를 대리했고 상대방의 위자료 청구에 방어해야 했다. 즉, 우리 의뢰인의 잘못으로 이혼하는 게 아니라는 주장을 해야 했다. 그런데 상간녀와 밀담을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시지나 누가 봐도 연인처럼 보이는 사진 등을 보면 내가 방어해야 할 의뢰인의 바람피운 증거는 차고 넘쳤다. 어떻게 된 건지 묻는 내게 의뢰인은 ‘그냥 아는 여자’라고만 했다. 한숨만 흘러나왔다. 그러면서도 내가 맡은 의뢰인을 변론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그럴싸한 표현을 찾고 변론 방법에 대해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게 뭐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냥 아는 사람’이라니…. 나는 ‘피고1과 피고2는 그냥 아는 사이이며 원고가 친밀한 둘 사이를 오해한 것뿐입니다’라고 서면 작성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담당 변호사인 내가 봐도 너무 명백한 사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뢰인과 함께 오리발을 내밀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사건은 정말 서면이 잘 써지지 않았다. 그날 재판정에서 판사는 내게 물었다.
“피고 측 대리인, 유책 배우자라는 사실을 부인하시네요?”
“네”
“아니 대리인, 카톡 메시지도 그렇고. 사진도 그렇고. 아니라고요?”
“네, 그냥 아는 사이라고 합니다.”
그날따라 10분의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내가 처음부터 이 사건을 맡았다면 의뢰인에게 이런 방향을 제시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당시에 나는 법률사무소에 소속된 변호사였기 때문에 회사와 의뢰인의 주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증거가 완벽한데, 단지 아니라고만 주장하는 말을 누가 믿어줄까. 의뢰인이 하자는 대로 앵무새처럼 말하는 변호사를 원한다면 사실 변호사가 할 일이 없다.
가끔 변호사를 무슨 대필가로 착각하는 의뢰인도 있다. 의뢰인의 말을 그냥 그대로 받아 적기를 바라는 의뢰인도 있다. 변호사는 의뢰인이 처한 상황에서 손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이 무엇인지를 함께 고민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의뢰인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방향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서 의뢰인을 대신해서 판사와 검사를 설득하는 사람, 보다 정확하게는 설득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변호사이다.
글을 잘 쓰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
법조인이 쓰는 글은 정형화된 틀이 있다. 판결문, 공소장, 준비서면 등은 모두 형식이 있어서 그에 맞춰 써야 한다. 처음 판결문이나 공소장을 보는 이들은 이를 당연히 어렵게 느끼기 마련이다. 변호사도 역시 법률용어를 사용하고 틀을 갖춘 서면을 쓰지만 의뢰인에게 설명을 해야 한다는 점이 판사나 검사와는 조금 다르다. 예를 들어, 서면에는 ‘기소’라는 용어를 쓰지만 의뢰인에게는 ‘검사가 법원으로 사건을 넘겼다’는 말로 대신한다. 변호사는 일상의 언어와 법률용어를 넘나들면서 서면을 쓰고 의뢰인과 소통한다. 요즘엔 법률 용어도 알기 쉬운 말로 바꾸려는 노력을 하고 있고, 최근에는 존댓말로 쓴 판결문이 등장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내 직업이 변호사라고 하면 말을 잘 할 거라고 생각한다. “말싸움 잘하겠어요”라며 농을 건네는 이들도 있다. 변호사지만 싸움도 싫어하고 말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변호사는 사실 달변가일 필요는 없다. 실제로 말을 아주 잘하는 변호사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지만 변호를 잘하는 변호사들도 많다. 나 역시도 말을 그리 잘하는 변호사는 아니다. 그래도 변호사로 일하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대신 변호사는 말보다 글을 더 잘 써야 한다. 변호사에게는 글이 곧 말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청산유수 같은 술술 흘러나오는 말이 아니라 논리 정연한 말을 잘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런 말을 평소에 많이 하면 말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오해를 받는다. 혹시 우리 자식이 말 잘한다고 생각해서 변호사 시켜야겠다 생각한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오히려 글 잘 쓰는 우리 아이를 소설가를 시킬 게 아니라 변호사를 시켜야겠다 생각하는 것이 더 나은 판단일지도 모른다. 여담이지만 반성문을 잘 쓰는 아이가 있다. 스스로 자신의 잘못이 무엇때문에 비롯되었는지 변명도 잘 하고 앞으로 그리하지 않겠노라 다짐도 그럴듯이 써내는 아이들이 있다. 딱 이런 아이들이 변호사 감이다.
사법 시험에 합격해 사법 연수원을 가게 되면 읽고 쓰는 연습을 하는 데만 장장 2년의 시간을 보낸다. 판결문 쓰는 연습, 공소장 쓰는 연습, 준비 서면을 쓰는 연습 등등 글쓰기 연습에 2년의 시간을 보내지 구술 시험을 보거나 한 적은 없다. 물론 말할 기회의 장은 많다. 발표도 많았고 건배사도 많이 했다. 그때만 해도 연수원에서 말 잘하는 동기들을 볼 때면 ‘우와~ 다들 어쩜 저렇게 말을 잘하지’라는 생각을 했다. 좌중을 압도하는 유려한 말솜씨는 내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변호사의 말하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말하기와는 좀 다르다. 변호사의 말하기는 글쓰기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변호사의 주된 업무인 읽고 쓰는 일에는 말하기가 전제되어 있다. 말하기도 글쓰기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잘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말을 잘하려는 노력 이전에 글을 잘 쓰고 싶은 생각을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나의 경우는 서면 쓰기를 넘어 교양 글쓰기까지 욕심을 부리고 있다. 이 책을 보고 있을 여러분은 어쩌면 내 욕심의 희생양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말하기에 영 자신이 없어서 글 쓰기에 집중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변호사가 글을 잘 쓰면 사건에 승소하느냐? 또, 그건 아니다. 제대로 주장했는지 주장에 맞는 근거를 제시했는지가 사건의 승패를 가르는 요소다. 그래서 변호사로서 글을 잘 쓴다는 건 얼마나 논리에 맞는 주장을 적절한 근거를 갖고 했느냐에 달려있다. 이를 요즘 관심이 높은 비즈니스 글쓰기로 대입 해보면 보고서를 잘 쓰는 글쓰기와 비슷하다.
변호사는 남을 위한 글을 쓰는 사람이다. 의뢰인이 원치 않으면 아무리 필요한 주장이라고 해도 할 수 없다. 의뢰인을 설득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설득조차 되지 않을 때도 부지기수다. 이런 경우 변호사로서 사건의 결말에 대해 최종적인 책임에서 해방되기도 하겠지만, 수임료을 내고 변호 서비스를 받는 의뢰인 입장에서 보면 변호사가 마냥 이뻐 보일 수는 없다. 초보 변호사 시절에는 변호사의 조언을 따르지 않는 의뢰인을 탓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의뢰인에게 그만큼 신뢰를 주지 못 해서 그러는 건 아닌가 하고 스스로를 되짚어 본다.
변호사는 의뢰인 편에 서서 일상의 언어를 법률 용어로 바꾸어 판사나 검사를 설득하는 글을 쓴다. 주로 하는 일이 사무실 모니터 앞에 앉아 서면을 쓰는 일이다. 그래서 내 일상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단조롭다. 서류에 파묻혀 한 편의 서면을 완성하기 위해 온종일 책상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이렇게 서면을 완성하고 나면 온 몸의 기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다. 그렇지만 애써 작성한 서면을 의뢰인이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잘 정리해주셨네요”라고 한마디 해주면 그동안의 고생은 일순간 사라진다.
어떤 때에는 의뢰인의 감정을 법에서 허용한 글로 다 담아내지 못해 안타까울 때도 있다. 특히 성폭력 피해자를 대리할 때는 그들이 얼마나 힘들고 아픈지를 다 표현하지 못해 무기력함과 답답함을 느끼기도 한다. 어쩌면 이런 마음이 내게는 sns 글쓰기의 욕구로 나타나는 것 같다. 서면에는 쓰지 못한 말을 꺼낼 창구가 필요하고 법적인 조언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조금의 도움이 되는 정보를 줄 수 있는 것 같아 열심히 쓰고 있다. 법정에서 미쳐 하지 못한 말, 서면에 쓸 수 없었던 이야기 등을 SNS에서 쓰면서 서면 쓰기의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내 글은 법률 정보가 주를 이루지만 때로는 위로와 용기의 말이 포함되기도 한다. 내가 의뢰인에게 했던 말, 혹은 반대로 내가 의뢰인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 등. 법정 뒤에서 일어난 여러 이야기들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이다. 어쩌면 이 글도 마찬가지 일수도 있다. 변호사에 대한 섭섭한 감정을 가진 사람이 변호사의 시시콜콜한 얘기를 보면서 인간적인 이해를 하게 되고, 그래서 좀더 좋은 변호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이 또한 좋은 일이지 않겠는가.
변호사의 글쓰기는 오늘도 법정에서 그리고 법정 밖에서 계속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