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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Mar 16. 2023

희망을 지지하는 일(2)

그녀는 나를 "마직(magic) 사람"이라고 부른다 


N과 처음 만난 지도 벌써 반년이 다 되어간다. 작년 가을 그녀와 처음 만난 후 "그녀가 비자를 새로 받을 수 있도록, 그래서 최소한 일이라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고 난민으로 인정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 목표라고 했었고, 새봄이 오는 동안 몇 가지 좋은 소식이 있었다. 


하나는 특별체류가 허가되어 외국인등록증을 만든 일이다. 그녀가 한국에 온 지 근 2년 만의 일이었다. 외국인 등록증이 나온 다음 날 N은 제일 먼저 은행에서 통장과 체크카드를 만들었다. 그다음 쿠팡에 회원가입을 하고 결제 카드를 등록했다(고양이 사료를 싸게 살 수 있다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G-1 비자를 받았으니 일을 할 수 있었고, 지인의 소개로 청소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취업허가를 받는 데까지 또 출입국을 몇 번 들락거려야 했지만, 드디어 약간의 수입이 생기게 되었으니 다행한 일이었다. 또 하나 좋은 일이 있었다. 작년 우리 단체의 송년회 때, 그녀를 후원하기 위한 그림 경매를 기획했다. 송년회에 모인 후원자들께 N의 사연을 소개하고, 그녀가 그린 그림들과 엽서를 팔아 그녀의 빠듯한 살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이모저모 그녀를 돕는 동안, 무엇보다 나를 노심초사하게 만든 것은 난민 사건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담당자에 따르면, 이 사건은 이의신청을 한 후 1년 10개월째 장기 미제로 남아있어 심의과에서도 빨리 쳐내야 하는 리스트에 올라와있었다고 했다. 2월에 심의가 예정되어 있으니 적어도 1월까지는 의견서를 제출해 달라고 하여, 나는 머리를 싸매며 고민을 시작했다. 


사실 우리 사무실에서는 난민 사건을 거의 맡지 않고 있다. 일반적인 이주민 분야의 사건을 다 상담하지만 난민의 경우 대리를 하지 않는 까닭은, 해당 분야가 많은 전문성을 요하기 때문이다. 난민법은 교과서도 존재하지 않고 일반적인 변호사들에게 생소한 요건과 법리들이 많다. 무엇보다도 난민 인정 요건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에, 난민 사건을 변호하기 위해서는 법리에 대한 공부부터 해야 했다(우리나라 난민 인정률이 1%밖에 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감이 올 것이다). 이에 더해서 개별 국가의 정황을 리서치하고, 외국인인 당사자의 진술과 증거자료를 정리 수집하며, 일일이 번역, 통역하며 상담하는 일까지, 일반 외국인 사건보다도 이래 저래 손이 많이 갈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난민 사건을 대리하는 데다 한번 불인정을 받은 사건이기에 한껏 걱정과 긴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와 상담을 하고, 자료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거의 3개월에 걸쳐 자료를 정리하고 서면을 작성해 보내게 되었고, 1월에는 추가 질의회신도 두 차례나 오고 갔다. 난민심의과에서 이 사건을 꽤 관심 있게 봐준다는 느낌이 들자 나도 욕심이 생겼다. 열심히 주장했는데, 인정되면 좋을 텐데... 확률적으로 낮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인정받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점점 커졌다. 


그리고 2월 26일, 드디어 이의신청 결과를 받아보게 되었다. 




결과는, 절반의 승리였다. 이의신청은 기각됐지만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게 된 것이다(인도적 체류자는 난민에 해당하지 않지만 ‘고문 등의 비인도적인 처우나 처벌 또는 그 밖의 상황’에 의해 ‘생명이나 신체의 자유 등을 현저히 침해당할 수 있다고 인정받을 합리적 근거’가 있어 ‘체류 허가’를 받은 외국인을 뜻한다). 그녀는 기각 결과에 매우 속상해했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고 말은 하지만, 자신이 겪어왔던 고통과 두려움이 부정당한 것 같이 생각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위로를 전하며, 인도적 체류 허가의 의미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또, 우리가 원하면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조금은 수긍하는 듯 보였지만, 어쨌든 난민 지위와 달리 취업에 있어 제약이 큰 것이 사실이기에 마냥 만족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추후 대응을 어떻게 할지는 차차 생각해 보기로 하고, 우리는 다음 약속 장소로 자리를 옮겼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에 가기로 했던 것이다.



벌써 1년이 지났다. 우크라이나 돈바스 내전이 러-우 전쟁으로 번지게 되면서 국제 정세도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런 와중에 우크라이나 전쟁에 무기를 지원한다는 서방과 한국을 보면서, 시민들은 전쟁이 장기화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우리는 지지와 연대의 의미에서 기자회견에 함께 가기로 했다. 발언 내용을 알아듣기 쉬운 말로 설명해 주자, N의 눈시울이 다시 붉게 물든다. "이거 진짜 맞아요, 한국 사람들 진짜 똑똑해요.. 부러워요.. 감사합니다.."


N은 한국이 평화로워 부럽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도 역시 "휴전 중"인 나라가 아닌가. 특히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은 N을 보면 옛날 한국 생각을 떠올리시는 모양이었고 유난히 안쓰러워하신다고 했다. 그런 얘기를 전해 들을 때면 더욱 우크라이나 전쟁이 남일이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왜 나쁜 역사는 반복되는 걸까. 아무 잘못 없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죽이는 끔찍한 일이 언제 끝날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무거워지던 기자회견이 끝나고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 나는 기분을 환기해 보려고 이런저런 즐거운 얘기들로 화제를 돌렸다. 그러던 중 그녀가 내게 툭 던진 말. 


내 주변에 마술사 진짜 많아요. 마직(magic) 사람이에요. 만나고 비자 생기고, 이렇게 좋은 일 많이 생겼어요. 마직 사람. 

고작 한국어를 좀 더 잘할 수 있고 약간의 법률지식이 있다는 내 얄팍한 능력을 magic이라 이름 붙이다니. 참 많은 생각이 든다. 내 마음을 알아주어서 고맙기도, 대단히 한 게 별로 없다는 생각에 머쓱하기도, 내가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부족한 게 있진 않았을까 미안하기도. 앞으로 닥쳐올 더 많은 난관을 지레 걱정하면서, 정말 마술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N과 나의 magical 한 여정은, 어떻게 끝나게 될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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