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안 나요’라는 진술의 위험성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하면 불리한 이유
필름이 끊긴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는데 어떻게 들어왔는지 기억나지 않을 때, 내가 했을 법한 실수들이 머리에 스쳐 지나가면서 화들짝 놀라 핸드폰부터 확인한 적 있나요? 액정이 깨지지 않은 걸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마자, 같이 놀았던 여동생으로부터 와 있는 카톡. 선배, 어제 나한테 왜 그랬어요?
얼마 전에 친구들이랑 술 먹고 필름이 끊겼어요. 그런데 같이 갔던 친구가 저를 강제추행으로 고소했더라고요. 드문드문 기억이 있긴 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조사받을 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어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해도 될까?
모든 진술은 기억나는 대로 해야 하니, 실제로 기억이 없다면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하면 돼요. 원칙적으론 그렇지만, 사실 ‘기억이 없다’는 진술은 전략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진술이에요. 특히 성범죄 사건에서는 더더 더더욱 그렇고요. 왜 그럴까요?
성범죄 사건의 특징을 생각해봅시다.
성범죄 사건은 직접적인 증거가 거의 없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CCTV가 있는 곳에서(!) 성관계를 하거나, 사전에 동의서를 받고(!) 성관계를 시작하는 경우도 거의 없죠. 범죄행위 그 자체를 보여주는 증거가 없어요. 그래서 사건 전후에 있었던 일들을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당사자들의 기억이고, 그중 누구 말이 맞는 것인지 판단함으로써 범죄행위가 있었는지 추론하게 됩니다.
★ 둘 중 누구의 말이 맞는 걸까?
고소인 : 자취방에서 술을 많이 마셔서 취해있었어요. 근데 제가 화장실 가는 길에 선배가 강제로 어깨를 주무르고 끌어안았어요.
상담자 : 그게 아니라 고소인이 화장실에서 토하고 나왔는데 몸을 가누지 못해서 넘어질 뻔하더니 저한테 기댔고, 제가 고소인을 부축해서 자리에 앉혔어요.
‘기억이 없다’고 진술하면 왜 불리한가?
그런데 기억이 없다고 진술하면, 경찰은 두 사람의 기억 중 누구 말이 맞는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고소인의 기억이 맞는지만 판단하겠죠? 이런 경우에, 고소인이 주장한 사실과 부합하는 다른 증거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범죄로 인정되기 아주 쉬워져요. 목격자가 고소인이랑 비슷하게 기억하고 있다거나, 목격자가 없더라도 고소인이 구체적이고, 일관된 진술을 한다거나, 다른 주장에 부합하는 증거들이 있다거나.....
고소인 : 자취방에서 술을 많이 마셔서 취해있었어요. 근데 제가 화장실 가는 길에 선배가 강제로 어깨를 주무르고 끌어안았어요.
상담자 : 전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는데요.
목격자 : 제가 본 사실은...
그 후에 변호사를 찾아와도...
이렇게 첫 조사에서 “기억이 없다”라고 진술해버린 경우, 나중에 “앗! 조사관님, 저 잃어버린 기억이 돌아왔어요. 사실은 전 그런 적이 없거든요?”라고 진술을 바꿀 수는 없잖아요?
결국 우리의 기억이 없는 채로 방어해야 하는데, 이때 변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① 고소인의 말을 믿기 어렵다는 주장을 하거나, ② 고소인의 주장에 부합하는 증거가 없다고 하는 등, “고소인의 주장”을 공격하는 것에 그칠 뿐, 적극적으로 “우리의 주장”을 펼칠 수가 없어요. 즉, 이미 이 사건은 고소인이 판을 짜서 이끌고 있고, 우리는 여기에 끌려다니면서 방어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어떤 경우에는 ‘기억이 없다’는 진술이 곧 ‘자백’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가져올 때도 있어요. 그러니 '기억이 안 난다'는 진술을 하려고 할 때는 조심해야겠죠?
'기억이 없다는 진술'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범죄 사건에서 '기억이 없다'는 진술은 위험성이 있으니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거예요. 조사를 급하게 받기 전에 기억을 되살려 보고(실제 사건에서 최면요법을 받아보기도!), 고소인의 주장이 정확히 무엇인지, 목격자와 다른 증거는 없는지도 잘 살펴본 뒤에 조사를 받아야 해요. 그런데도 기억이 없다는 진술을 할 수밖에 없다면, 그렇게 진술하고 그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지 전략을 짜야겠죠?
기억이 흐린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음에 한 번 정리해볼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