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다움”에 빠져있는 당신에게
김지은 비서는 ‘강간통념’의 희생양일까?
강간 피해자를 떠올리면 어떤 모습이 연상되나요? 격렬하게 저항하다 가까스로 벗어난 뒤 상대방에 대한 분노에 차있는 피해자? 우울증으로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는 피해자? 피해자답지 못한 태도를 보였으면 피해자가 아닌 걸까? 나아가, 강간 피해를 당한 후 태연한 태도를 유지했던 피해자들은 고소가 어려운 걸까?
안희정 사건의 1심 선고, 그 후...
지난주 가장 뜨거웠던 성범죄 사건은 안희정의 김지은 비서에 대한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강간 및 강제추행 사건이었어요. 1심 무죄 판결이 선고되자 대중들은 일제히 김비서를 비난하기 시작했어요. 대중들의 반응은 주로 “강간을 당했는데 피고인을 안아줬다니 말이 되냐!”, “씻고 오라고 할 때 싫다고 했어야지”, “벨트를 본인이 풀었다면서?”등의 내용인데, 정리하면 위와 같은 모습은 “강간 피해자라고 보기 어려운 모습”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무죄 선고가 당연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김비서를 “불륜녀”라고 칭하거나, 김비서가 “거짓 미투”를 했다는 댓글도 종종 보이네요.
앞서 강간 피해자를 떠올려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실제 피해자들은 당신의 기대와는 다른 태도를 많이 보인답니다. 피해를 당한 이후에도 (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같이 태연한 태도를 유지하는 피해자들이 굉장히 많고, 특히 직장, 학교, 가족 내에서 성범죄 피해를 당한 경우에는 더욱 그런 경향이 있어요. 모든 강간 피해자들이 여러분의 기대와 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이런 기사 제목을 볼 일은 굉장히 드물 거예요.
“친부로부터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강간 피해를 당한…”
재판부도 통념에 근거한 판단을 한 걸까?
판결 전문은 총 114쪽에 이른다고 하는데 저도 아직 판결 전문은 보지 못했어요. 그래서 아직 이 사건에 대해 구체적으로 판단하기는 쉽지 않지만, 재판부에서 보도 자료로 배포한 요약문과 각종 기사들을 보면, 재판부도 고소인의 일부 행동이 ‘피해자답지 않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서울서부지방법원 보도자료
① 2017. 7. 30.경 피감독자 간음
- 이 당시 피고인과 나눈 텔레그램 대화 내용이 대부분 삭제되어 있는데, 그 과정에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음
② 2017. 8. 13.경 피감독자 간음
- 피해자는 운전비서에게 만실이 아님에도 호텔이 만실이라는 취지로 말하여, 다른곳에 숙박토록 함
④ 2017. 11. 26.경 위력 등에 의한 추행
- 피해자 스스로가 벨트를 풀어 피고인이 음부를 만지는 행위를 용이하게 함
- 피해자는 승합차 운전기사가 눈치챌까봐 벨트를 풀어 딸그락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하려 했다고 진술
⑤ 2018. 2. 25.자 피감독자 간음
- 피해자가 스스로 피고인이 출연하는 명견만리 촬영장으로 감
- 피고인의 명견만리 녹화 종료 후 당일 저녁에 대전에 내려갔다가 피고인의 연락을 받고 심야에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는데…
그런데,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일반인들이 성범죄 피해자들의 심리와 행동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우리가 “성범죄 피해자라면 응당 이렇게 행동해야지”라고 생각하는 모습의 대부분은 미디어를 통해 무비판적으로 학습된 “피해자 이미지”일 가능성이 높아요.
성범죄 전문 심리위원
그래서 성범죄 사건에서는 전문 심리위원의 평가를 참고하기도 해요. 이 사건에서도 전문 심리위원이 고소인의 심리를 평가한 결과 고소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평가를 내렸던 것으로 보이는데, 재판부에서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고소인이 전문직으로 활동하는 성인 여성으로 성적 주체성이 성숙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데... 실제 재판에서 전문가의 평가와 반대되는 판단을 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이 부분은 다소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고, 개인적으로도 조금 아쉬운 부분이에요.
무죄판결의 결정적인 근거는?
인터넷에서 쏟아지는 김비서에 대한 악플을 보고 글을 쓰게 된 것이었는데, 막상 판결문 요약본을 보고 나니 다른 게 더 눈에 띄었어요. 성범죄 사건에서는 “누구의 진술이 더 믿을만한가”를 근거로 판단하게 되는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진술의 일관성”이에요. 특히 시간이 갈수록 진술의 내용이 더 구체화되거나 당초 피해사실에 포함되지 않았던 것이 나중에 추가되면, 피고인을 변호하는 입장에서는 이럴 때 속으로 땡큐를 외치게 되거든요..! 실제로 강간 무죄판결문에 “고소인 진술이 시간이 지날수록 구체화되어 믿기 어렵다”라고 명시되곤 해요.
아무튼, 이 사건에서도 그런 모습이 자주 발견되는데...
① 2017. 7. 30.경 피감독자 간음
- 피해자와 신○○의 진술 불일치 등
② 2017. 8. 13.경 피감독자 간음
- 피해자의 증언․진술이 점점 구체화․강화되고 있는 경향이 있으며, 한편 피해호소 사실과 관련하여 신○○와의 증언․진술과도 배치됨
③ 2017. 9. 3.경 피감독자 간음
- 피해호소를 했다는 피해자와 신○○와의 증언은 객관적인 통화내역 등과 불일치하는 부분이 있음
② 2017. 8. 10.경 추행의 점
- 피해자는 다수의 강제추행의 점을 고소하면서도 애초 공소장에 이 부분은 포함시키지 아니함
- 피해자의 검찰에서의 진술과 법정 증언이 상이함
② 2017. 8. 10.경 추행의 점
- 피해자는 다수의 강제추행의 점을 고소하면서도 애초 공소장에 이 부분은 포함시키지 아니함
③ 2017. 8. 12. 강제추행의 점
- 사건 현장인 화장실의 구조와 피해자의 증언․진술간에 불일치가 있음
④ 2017. 8. 16.경 강제추행의 점
- 이 부분 또한 최초 고소장에 포함되어 있지 아니함
⑤ 2017. 8. 중순 ~ 말경 추행의 점
- 피해자의 수사기관 진술 및 증언의 내용이 강화, 추가되기도 하며,
사실, 판결문은 작성자가 처음부터 결과를 정해놓고 작성하는 것이라서 판결문만 봐서는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기 쉽지 않아요. 다만 재판부가 “사회통념”, “일반상식”에 따른 판단을 하기도 했지만, 보다 결정적으로는 고소인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아서 무죄를 선고했던 것은 아닌가 싶어요.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는 피해자들, 고소가 어려울까?
전문 심리위원의 평가를 받겠다고 해보자
고소인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받기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면, 시간이 더 지체되기 전에 고소하고(시간이 지체될수록 고소인에게는 유리할 것이 없어요) 전문 심리위원의 평가를 받아보세요. 물론 고소인에게 불리한 평가가 나올 수도 있다는 점은 유의하셔야 해요.
변호인에게는 반드시 진실을 말해야
가끔 자신의 행동이 오해를 살까 봐 변호인에게도 숨기는 경우가 있어요. 하지만 불리해 보이는 일이 있을수록 미리, 낱낱이, 진실 그대로 알려줘야 대응할 수 있어요. 변호인은 의뢰인의 편이지, 의뢰인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게다가 만일 고소를 하면 오히려 무고죄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경우엔 안타깝지만 고소를 포기하셔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꼭 진실을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법원도 바뀌고 있으니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어요.
요즘 성범죄 사건은 과거의 판결과 다른 판단을 하는 경우가 많아요. 피해자와 가해자의 심리에 대해서도 많이 연구하고 판결하려는 경향이 있고요. 저도 이번 안희정 사건 재판이 있었던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강간 사건을 했었는데, 판사가 먼저 전문 심리위원의 평가를 받아보겠냐고 제안했었고, 고소인과 피고인의 심리에 대해 많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어요.
당시 고소인이 한 번도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피고인의 움직임에 맞춰 몸을 움직이기도 했었는데, 판사는 ‘강간 피해자가 언제나 격렬한 반항을 하는 것은 아니고, 경우에 따라 자포자기, 얼어붙음 등의 태도가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고, 피고인이 잘못을 인정하듯이 말했던 것에 대해서는 ‘발언의 취지가 범행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소인 및 고소인의 지인들이 갑자기 추궁하며 몰아세우자 당황한 피고인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일단 사과를 한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어요. 법원도 나름대로 깊은 고민을 하면서 판결을 내리고 있는 것이죠. 덕분에 저는 세 시간 넘게 법정에서 나오지 못하고 난상토론을 벌여야 했지만....
무엇보다도 일반인들의 인식 변화가 따라줘야 하는 시점이에요.
이번 안희정 사건의 1심 판결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이 참 많지만, 오늘은 “강간통념”에 대해서 이야기해봤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편견과 고정관념 중, “강간 피해자라면 이렇게 행동했어야지!”라는 “피해자 다움”이 있고, 그게 틀릴 수도 있다는 점을 인식하면 좋겠어요.
사회 일반의 인식이 바뀌면 그것이 판결에 영향을 미치고, 과거보다 더 나은 판결을 만들게 되거든요. 성범죄 사건은 특히나 그렇고요. 부부 사이에도 강간죄가 인정되는 것으로 바뀐 것, 남성이 성범죄 피해자일 수 있다는 것, 모텔에 같이 가더라도 강간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 야한 옷을 입어서 강간 피해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이런 것들 모두가 우리의 인식이 바뀌면서 따라온 것들이거든요.
“강간 피해를 당했는데 나는 왜 가해자 앞에서 웃고 있는 걸까”라며 자책하고 있는 피해자들도 스스로를 그런 통념에 가두고 있는 것일 수 있어요. 김지은 비서에게 “피해자 맞느냐”며 조롱하는 것도 가해행위가 될 수 있고요. 저는 그런 분들이 용기 내서 피해사실을 알리고 고소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변호사로서 열심히 연구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