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 날의 의미 옥과 용주사 체험
조세전문변호사 고성춘
[부처님 오신 날의 의미]
옥과 용주사
곡성 옥과에 용주사라는 곳이 있다. 조용하고 번잡하지 않는 곳이다. 옥과읍까지는 버스로 갈 수 있지만 거기서부터는 택시를 타야 한다. 그곳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바로 그곳에서 처음으로 불교를 접했기 때문이다. 1992년 20대 후반 여름이었다. 그 절에 머물면서 고시공부를 하던 친구 연락을 받고 머리나 식힐 겸 찾아간 곳이었다. 절은 조그마했지만 바위절벽 높은 곳에 지어놔서 그런지 운치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절에 대해서 일자무식이었다. 절에 간들 법당에 들어가서 예불하고 기도하는 것은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단지 관심이 있다면 공부와 땅을 파는 것이었다. 나이는 곧 30이 되는데 아무 것도 이룬 것 없이 고시라는 막연한 것에 매달려 정력을 소모하고 있는 나의 젊음이 너무나 답답하여 날마다 공부하는 틈틈이 곡괭이로 땅을 파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였다. 세 달 정도 머무르면서 파놓은 깊이가 상당하였다. 아마 1년 치의 쓰레기를 버려도 충분하였을 것이다. 공병대에서 제대한지 1년 밖에 되지 않았다.
잡기를 별로 즐기지 않는 성격이라 잡담을 할 상대가 없는 절이 공부하기에 아주 좋았다. 시간되면 밥 먹고, 공부하고, 어둠이 깔리면 잠을 자고, 방에 TV도 없다보니 공부 외에는 시간 보낼 것이 없었다. 공부만큼은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하면서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지나다가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속담처럼 저녁공양을 한 후 산책을 하고 오면 꼭 그 시간이 저녁예불시간이었다. 법당 밖으로 들려나오는 염불소리가 가슴을 쏴하게 적셔주곤 하였다. 그 절에는 비구니스님 세 분이 있었다. 한분은 주지스님이었고 다른 한분은 나와 같은 용띠인 그분의 상좌스님이었고 다른 한분은 기도하러 온 혜각스님이었다. 기도스님은 경상도 분이었는데 지장기도를 하러 전국의 기도처만 돌아다니고 있다고 하였다. 기도를 많이 한 분이라서 그런지 여자여도 대장부처럼 기개가 있었다. 몸집도 그랬다.
어느 날은 나도 한번 법당을 들어가 보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무작정 법당 문을 열고 들어간 것이었다. 법당문은 집에 있는 방문과는 달리 아주 크고 무겁다. 문고리도 큰 것으로 달아놓는다. 그 문고리를 잡고 무거운 문을 열기위해 힘을 주고 문을 연다는 것 자체가 내 마음이 열어졌다는 증거였다. 종교에 대한 무관심하고 냉랭한 가슴이 따뜻하게 열렸다고 볼 수 있었다. 스님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였다. 일어서면 같이 일어나고 절하면 같이 절하고 염불하면 입만 뻥끗 뻥긋 하였다. 무슨 의미였는지는 전혀 몰랐지만 듣기는 참 좋았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주었다.
상좌스님이 나의 이런 모습을 며칠 지켜보다가 따로 시간을 내서 예불문을 가져와 직접 목탁을 치면서 가르쳐주었다. 예불문부터 반야심경, 천수경까지 째를 맞춰가면서 며칠을 따라하였다. 그제야 스님들의 염불을 듬성듬성 따라 할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내가 법당을 들어가게 된 이유는 딴 게 아니었다. 마음이 차분해지기 때문에 그게 좋아서 들어갔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의 주된 관심은 공부였다. 예불시간이 30분이 넘어서면 공부시간이 뺏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얼른 법당문을 열고나와 방으로 올라갔다.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드리다보니 머리가 무척 시원하였다. 그리고 체력이 좋다보니 법당에서 요사채까지 오르막 계단을 뛰어다녔다. 그래서 스님이 지어준 별명이 다람쥐였다. 한번 방에 들어가면 밥 먹을 때 외에는 거의 나오는 일이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머리로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저 방문만 나가지만 않는다면 공부시간을 뺏길 아무런 이유가 없을 것이다.”
책상이 있었지만 가부좌를 튼 채 조그마한 책상에서 공부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반가부좌를 틀고 몇시간이든 한번 앉으면 밥 먹으라는 목탁소리에 할 수없이 일어나야 했다. 저녁때는 정확히 10시에 1분 1초도 안 틀리고 잠이 몰려오면 그대로 뒤로 누우면 그 다음날 새벽 4시였다.
상좌스님이 관세음보문품경을 날마다 목탁을 직접 치면서 나의 합격을 위해서 읽어주었다. 처음 며칠은 그분의 성의가 고마워 매일 아침 9시쯤 약속시간에 맞춰 법당으로 내려갔었다. 그러나 그게 한번 다 읽는데 30분이 더 넘게 걸렸다. 그러니 한두 번이 아니라 날마다 한다고 한다면 아침 공부시간을 무려 1시간이나 빼먹는 거였다.
‘공부가 주(主)이지 염불이 주이지 아니지 않는가. 아무리 성의라지만 공부에 방해가 되면 안해야 한다.’라고 독하게 마음먹고 법당으로 내려가지 않는 날이면 어김없이 “고군!”하고 법당에서 외치는 스님의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날은 그 소리가 저승사자의 외침으로까지 들렸다.
솔직히 그 보문품경 내용을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절벽을 떨어져도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칭하면 관세음보살이 받쳐주고, 풍랑을 만나도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칭하면 풍랑을 면하게 해주고, 사형을 집행당해도 칼날이 산산조각 날 정도로 관세음보살이 지켜준다는 내용들이다. 게다가 관세음보살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서 위해준다고 한다.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될 수밖에 없다. 느껴보지 않으면.
어느 날은 가을햇살이 너무 좋아 경내에 있는 큰 바위 위로 올라가 책을 보았다. 막상 올라가니 가을 햇빛에 책을 보는 게 눈이 부셔서 책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책을 접고 저 멀리 절을 구경하러 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다. 저수지에서 밤낚시를 한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이른 아침부터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일행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참 한심해 보였다. 이른 아침부터 술에 취해 있는 모습들이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영문인가. 바로 그 순간 그 사람들이 불보살의 화현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뭔가 나에게 암시를 주기 위해 오는 불보살의 화현이구나”
그 느낌을 받은 후부터 이전의 사람이 다들 달리 보였다. 단지 지금 이 순간 만나서 지내는 사람정도가 아니라 나를 위해 뭔가를 가르쳐주려고 하는 불보살들로 모두 보였다. 그러니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수승한 기도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마음에 틈이 없으니 저절로 놔두어도 공부가 순항을 하였다. 특히 새벽예불을 보고 난 후 하는 새벽공부는 책을 읽은 내용이 사진처럼 그 즉시 떠오를 정도로 기억이 선명하였다.
어느 날이었다.
주지스님이 어디론가 행차를 하시는 모양이었다. 절 입구까지 내려가다가 절벽 위 요사채 마루에서 스님들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상좌스님이 발견하고 “고군, 같이 갈래?” 라고 말하였다.
“어디를 가는 거죠?”
“청화스님이라고 큰 스님 뵈러가는 거예요.”라고 스님 옆에 있던 상좌스님이 대답하였다.
순간 내 공부와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 생각하니 별 관심이 없었다.
“스님 잘 다녀오세요.”
그러자 주지스님이 말하였다.
“고군이 이때 아니면 볼 수 없는 아주 큰 스님이지.”
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고 하는 상좌스님도 같이 거들었다.
“그래요. 같이 가요.”
가을 햇살이 따사로웠다. 머리를 감고 몇 분만 있으면 마를 정도로 햇빛이 좋았다. 그런 햇빛을 잠깐씩 쐬는 것이 좋았다. 근데 잠깐이라면 몰라도 멀리 한번 나갔다오면 그날 오후 공부를 못하기 때문에 가는 것이 싫지는 않았지만 부담이 느껴졌다. 이런 마음을 알았는지 상좌스님이 다시 다그치는 조로 말하였다.
“여기서 30분 밖에 안 걸려요”
그 순간 생각해봤다.
“뭐든지 지금 이순간은 두 번 다시 안 온다.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갈등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인생은 어떻게 보면 만남의 연속이다. 그 만남은 자기도 모르는 때에 우연히 찾아온다. 마치 소설에서의 복선과 같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그게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 만남은 아주 적절한 때에 이루어졌다는 것도 알게 된다.
청화스님은 웬만한 불자라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스님이다. 그분을 뵐 때 연세가 일흔 둘이었다. 지금은 팔십이 넘으셔서 열반하셨다. 곡성 태안사 토굴에 오랫동안 계시면서 수행정진을 여법하게 하였다고 한다. 3년 결사를 하시면 절 밖으로 일체 나가지 않고 수행만 하였고, 계율에 철저하기로 유명한 분이었다.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고 스님을 따르는 신도들도 계율에 유독 철저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오히려 스님들보다 더 계율에 엄격한 신도들도 있었다.
스님을 뵈었다. 스님을 뵙기 전에 주지스님이 삼배를 하라고 하였다. 삼배를 하고나서 자리에 스님들과 같이 앉았다. 스님은 깡마른 체구에 연세가 들어보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스님이 계신 방에 놓여있던 부처님의 고행상이었다. 갈비뼈가 훤히 다 보일 정도로 고행을 한 모습이었다.
‘내 모습이 바로 저 모습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스님은 말씀을 아주 빠르게 하시는 분이었다. 옆에서 듣고 있는 나는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는지 귀를 쫑긋 세우지 않으면 알아듣지를 못했다. 단지 할 수 있는 것은 같이 간 스님들과 말씀을 나누고 있는 그분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었다. 나는 그분을 뵙기 전만 하더라도 ‘얼마나 대단하기에 사람들이 다 큰스님하면서 저럴까’라는 반발심이 마음한구석에 숨겨 있었다. 그리고 막상 그분을 봤을 때 실망하였다. 시골의 인자한 어른과 별로 다름없었다. 위대해 보일만한 점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큰스님하면서 떠받드니 얼마나 위대한지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그분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눈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런 나의 무지한 행동은 얼마가지도 못했다. 잘못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스님의 눈길 한번에 꼬리를 내렸다. 찰나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한 순간에 기가 죽었다.
대화가 거의 끝날 무렵에 나를 보면서 주지 스님이 말하였다.
“큰스님에게 뭐하나 달라고 그래”
막상 그런 말을 들으니 특별히 뭐를 달라고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특별히 뭐가 필요한 것은 없었지만 받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에 용기를 내어 염주나 한 개 주라고 하였다. 스님은 옆방으로 들어갔다 오시더니 염주가 없다고 하면서 목에 차고 있던 염주를 벗어서 주셨다. 나무뿌리로 만든 염주라서 좋아보였다. 큰스님이 가지고 있는 거라서 더욱 좋아보였다.
그분을 뵙고 나오는 길이 유난히 가을햇살에 빛나보였다. 왠지 모를 환희심이 났다. 큰스님이라는 분으로부터 염주까지 받으니 더 기분이 좋았다.
나중에 큰스님을 다시 뵐 기회가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스님 두 분과 같이 갔다. 이제는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과연 내가 고시에 합격할 수 있는지를 묻고 싶었다. 내가 볼 때는 고시를 빨리 합격했더라면 이런 생각이 안 들었을 것이다. 다 자기 노력으로 합격한 것이고 열심히만 하면 누구나 다 합격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서른이 되어 갈 정도로 합격을 하지 못하니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경우를 겪으면서 뭔가 운명이나 팔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가 바로 그런 시점이었다.
“큰스님, 제가 합격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물어봐도 큰스님은 나의 개인적인 문제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단지 일반적인 대답만 할 뿐이었다. 옆에 같이 앉아있던 상좌스님이 거들어주었다.
“고군이 우리 절에서 제일 기도 잘해요.”
스님과의 대화는 예전보다 훨씬 더 길어졌다. 스님과 헤어지면서 스님은 밖으로 배웅을 해주었다. 내손을 살짝 잡으면서 해주신 말씀을 두고두고 잊지 않는다.
“보이는 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훨씬 더 큽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기억력도 훨씬 더 좋아질 것입니다.”
그 밖에 여러 말씀이 있었지만 확실하게 기억하는 말씀은 이 부분이다. 그 후 청화스님의 말씀을 기록해 놓은 책들을 읽을 수 있었다. ‘마음의 고향’이라는 한 달에 한 번씩 나오는 조그만 책이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대목들이 있다. 그때는 그 책속에 있는 말들이 전부 마치 나를 보고 해주는 말들로 느껴졌다.
百千萬劫 久習結業, 以實相觀 卽皆消滅
백천만겁 구습결업(백천만겁 동안 익히고 쌓인 업장이) 이실상관 즉개소멸(실상을 관찰하는 것으로써 즉시에 다 소멸된다)
진공묘유(眞空妙有) 물질은 텅 비어서 진공이고, 다만 묘한 무언가가 있다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
어느 날은 2시간의 새벽기도가 끝났어도 계속 절을 하고 싶었다. 혼자서 법당에 남아 계속 절을 하였다. 근데 희한하게도 절을 일배도 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 때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없겠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신심 있게 하루하루 공부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주지스님이 고시생을 두 명 정도 더 들인다고 하였다. 그 말이 있은 후 어떤 사람이 절을 찾아왔다. 나이가 들어 보였다. 내가 볼 때 그는 이 절이 공부하기에 적합한가 여부를 미리 알아보러 온 것 같았다. 그 사람이 나에게 물어본 말이 있었다.
“이 절에서 공부하기가 어떻습니까?”
나 이외에 다른 누가 온다는 것 자체가 벌써 나에게는 부담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잘 안다. 나 혼자만 있으면 공부가 잘된다. 내 스스로 해찰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꼭 사람과 어울리다보면 스스로 허물어지는 경우를 많이 당하였다. 아마 그런 연속이었을 것이다. 이 절에 있게 된 이유도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고시생으로 부터는 멀어지고 싶었다. 남들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 또는 혼자 하는 것보다 같이 하는 것이 공부가 더 잘된다고 하면서 신림동 고시촌이나 대학교 도서관에 모여서 공부하였지만 이미 고시에 싫증이 날정도로 해봤기 때문에 나 혼자 있는 것이 오히려 나를 위해 도움이 되었다. 실제로 그랬다. 공부하다가 누가 같이 쉬자고 그러면 같이 쉬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갈등은 하게 된다. 재미있는 공부가 아니라 억지로 참으면서 하는 공부다보니 조금이라도 옆에서 바람을 넣으면 나같이 남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꼭 공부리듬을 잃어버리고 나중에 후회하곤 하였다. 그러니 그 사람에게 좋은 말을 해줄리 만무하였다.
“요즘은 정보가 중요해요. 이런 절에서 공부하다보면 정보에 둔감하게 되죠. 더구나 이 절은 밥이 별로예요”
그는 자기를 따돌리려는 나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허를 찌르는 말을 하였다
“선배님은 그래도 이 절에서 공부하고 있잖아요.”
“나는 그동안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하는 거죠.”라고 말을 흐리면서 변명 아닌 변명을 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 그 학생이 짐을 싸들고 올라왔다. 그리고 또 며칠이 있자 대학교를 휴학한 여학생이 올라왔다. 주지스님과 잘 아는 신도의 딸이라고 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경찰 고급간부였다. 희한하게도 그전에 온 학생이 공부하고 있는 게 경찰간부후보생 선발시험이었다.
최대한 그들과 거리를 두고 지냈다. 밥 먹고 같이 산책하는 정도였다. 공부시간 도중에 같이 잡담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역시 사람이다 보니 한번 같이 말문을 트면 산책시간이 길어지곤 하였다. 그리고 어쩌다 저녁에 잡담하는 시간도 가지게 되었다.
마침 그때는 체력이 많이 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루 세끼 밥만 먹는데다 반찬은 된장국에 나물이 전부였다. 처음에는 절밥이 맛있었지만 그게 한두 달이 아니라 세달 째로 넘어가다보니 이제는 반찬만 보면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특히 밥은 묵은 쌀로 한 것이라서 풀기가 없었다. 더구나 비구니 사찰이다 보니 밥보다는 빵 같은 것을 더 좋아했고 밥도 많이 먹지를 않다보니 아침에는 죽으로 먹었다. 대신 떡이나 과일을 자주 주곤 하였는데 나는 간식을 거의 하지 않는 습관인데다 더욱이 그것을 먹고 나면 곧바로 책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소화시키기 위한 시간을 가져줘야 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속이 허전하다보니 쓰리기 시작했다. 먹는 것 때문에 체력이 점점 떨어진다 생각하니 반찬에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다. 이런 나의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기도스님이 직접 떡볶이를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주지스님은 나뿐만 아니라 같이 있던 다른 두 사람도 데리고 읍내로 나가서 소고기 불고기를 사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먹었지만 나는 먹을 수가 없었다. 국물을 한 숟갈 떠먹어봤는데 속이 뒤집혀 창자가 꼬이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속에 기름기가 전혀 없다가 기름기 있는 음식이 들어가니 속에서 받지를 못한 것이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스님들도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것을.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있듯이 공부가 잘되다보니 엉뚱하게 뜻하지 아니한 복병을 만난 것이었다. 그때 나는 온통 먹는 것에 신경이 곤두세워져서 예민하였다. 몸이 지쳐 예전처럼 공부가 안될 때는 더욱 그랬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침 그날은 첫눈이 오는 날이었다. 제법 눈이 쌓여 주위가 하얀색 일색이었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방문 밖을 나서니 웬 중년의 남자가 주지스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절 입구 건너편에 있는 음식점 사장이었다. 눈이 와서 산책 겸 절을 찾아 온 것이었다. 그리고 공부하고 있던 우리들을 보더니 언제 한번 밥 먹으러 오라고 하였다. 그 말이 씨가 되었던지 그날 저녁도 밥이 잘 넘어가지 않다보니 허기가 졌고 마침 그 사장의 말이 생각이 났다. 경찰간부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을 꼬드겨 그 음식점으로 밤길을 헤쳐 갔다. 막상 찾아가니 그 사장은 의아해하였다. 그러나 밥을 먹고 싶다는 우리들에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에다 김치를 가져다주었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두 그릇을 훌쩍 비워버렸다. 밥을 맛있게 먹는 우리들을 보면서 사장은 소주 한 병을 갖다 주었다. 긴장했던 마음이 한번 풀려버리니 사람이 어리석게 되어버렸다. 그날 저녁 소주 두병을 나눠 마시고 절로 돌아오는데 술기운이 온몸에 퍼져 인사불성이 되어 버렸다. 고기 한 점을 못 먹는 속에다 술을 부어넣었느니 안 취하고 배기겠는가? 술을 많이 먹을 수 있다는 이유는 속에 기름기가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니 풀만 먹는 수행승이라면 술을 많이 먹을 수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아니면 평소에 잘 먹는다는 의미가 된다.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오는 마루에다 토하기 시작하면서 새벽 내내 토하다가 날이 밝았다. 옆에 방에 기거하고 있는 기도스님이 화를 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내 의지로 나를 지탱할 수 없었다. 아침의 새벽기운을 받고서야 조금 속이 진정되었다. 법당 뒤에 있던 사과를 하나 꺼내 먹었다. 속이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즉시 택시를 불렀다. 짐을 다 싸서 그날로 집으로 와버렸다. 주지스님에게만 간다는 말만 전하고 도망치듯이 절을 떠나버렸다. 이게 나의 큰 결점이다. 신중하지 못하고 경솔한 판단을 너무 쉽게 한다는 점이다. 안해야 할 판단은 너무 쉽게 너무 빠르게 하는 반면 해야 할 판단은 너무 느긋하게 하는 게 큰 고질병이다. 결국 그 업의 대가를 톡톡히 받았다.
우선 절을 떠나고 나니 새벽에 똑같은 시간을 일어나더라도 예불을 보면서 느끼는 경건한 분위기를 맛볼 수 없었다. 아무리 신심이 좋은 사람이라도 혼자서 그 분위기를 연출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우선 그게 제일 힘들었다. 차라리 그 맛을 몰랐다면 그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힘든 것은 절이라는 넓은 공간에서 공부하다가 집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공부하는 것이 힘들었다. 집근처에 있는 대학교 도서관으로 가서 공부하더라도 왔다 갔다 하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없었다. 모든 환경이 절과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절에서의 생활이 워낙 익숙해 있다 보니 가끔씩 집에 오기 위해 버스를 타고 오다 보면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이질적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어떻게 이런 곳에 살아가지”라고 의문이 들 정도로 숨이 콱콱 막혔었다. 그러니 절집을 뛰쳐나온 후로 가는 곳마다 마음에 들지 않으니 후회막심이었다. 나의 모습이 딱하게 여겨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인도해주어 나에게 딱 맞는 장소를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마다하고 나와 버렸으니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3년을 더 고생해야 했다. 안 해도 될 고생을 사서 한 격이었다. 결국 나의 업력이다. 쉽게 비위 상하는데다가 비위가 뒤틀리면 뒤끝을 보지 않고 쪽박을 깨버리고 뒤늦게 후회하는 것이다. 전생부터 계속 가지고 다니는 끈질긴 습성이다. 결국 이 습성 때문에 또 한 번의 후회를 시험에 합격한 후 감사원에서 근무하다가 사표쓰고 나온 후 다시 하게 되었다.
사람이 어디를 가도 나를 오라고 반기는 사람과 장소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내 마음에 안 맞는 점이 분명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게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면 사람들에게 비위 상할 필요 없이 한 장소에 오래 있는 게 장소가 주는 힘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이다. 그렇지 않으면 혼자서 그 힘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인가. 힘만 들다가 아무 성과를 보지 못하기 마련이다. 사람이 항상 겸손해야 하고 하심해야 할 이유다. 나만 보지 않고 다른 사람도 보이기 때문이다. 나만 생각하고 내 기분만 생각하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장애만 생기고, 왔던 운도 차버리는 어리석음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나이들수록 '나는 행자다.'라고 생각을 더 해야겠다. 하심을 가지기도 어렵지만 유지하기는 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