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없는 경험은 없고, 그 경험들은 연결된다.

입사 후 반도체만 공부했던 변호사의 이야기

by 박종현

부푼 꿈을 안고 대형로펌에 입사했다.

입사 첫 주부터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 사건에 합류하라는

제안을 받았기 때문에 기대감은 더 커졌다.

얄궂게도 그런 설렘은

첫 주 금요일 밤에 선배의 이메일을 받으면서 절망으로 변했다.



선배는 영문으로 된 반도체 기술 관련 자료를 이메일로 잔뜩 보내면서,

월요일 오전에 선배들이 볼 수 있도록 번역하고

기술과 부품에 대한 해설도 추가하여 정리자료를 만들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면서 내가 만든 자료를 보고

선배들이 전략과 법리를 구성할 것이니

신경 써서 해야 한다고 했다.



너무 막막했고, 부담감에 어쩔 줄 몰랐다.

전형적인 문돌이인 내가 영어로 된 반도체 기술 자료를 번역하고 해설까지 하라니…

게다가 분량도 상당했고 주어진 시간은 고작 주말 뿐이었다.

서둘러 책을 구하고 여기 저기 검색하고,

공학 박사인 친구들에게 물어가며

이틀 밤을 꼬박 새서 어찌어찌 번역과 해설을 마쳤다.



월요일 오전에 납품하고 한숨 돌린다 싶었으나 이제 시작이었다.

워낙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기술 관련 리서치는 정말 끝이 없었다.

그렇게 변호사가 되고 1년은

반도체 기술과 부품을 리서치 하면서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그때는 정말 법률보다 기술 관련 책과 논문(그것도 영어로 된!)을 훨씬 많이 봤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리서치 했던

반도체 장비의 회로도와 각 부품이 눈에 선하고,

해당 부품들이 어떻게 구현되는지,

부품별 유명한 제조사와 시장의 경쟁관계가 어떠한지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 하지만 당시에는 정말 고통스러웠다.

나는 변호사인데 여기서 무얼하고 있나 하는 자괴감도 심했고,

일단 내용이 너무 어려웠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1년을 보내니,

기술 관련 자료를 대해도 별로 겁이 나지 않았다.

아무렴 입사 첫 주 금요일 밤에 보았던

그 자료보다 절망스러울까 하는 이상한 자신감도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런 기운을 뿜어서인가

개업을 한 이후에 우연한 기회로

기술 관련 자문과 소송을 여러 건 하게 되었다.



최근에도 AI 관련 자문을 몇 건 하였고,

저작권, 특허 관련 소송을 맡기도 하였다.

처음 보는 기술이었지만

차분히 리서치를 거듭하여 수행하니

의뢰인도 결과물에 만족하셨고,

추가 건도 의뢰받았다.

이 모든 것은 고통스러운 신입의 첫 해가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일이다.



그때는 이러다가 변호사로서 1인 분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컸는데,

그때의 경험이 변호사로서 살아가는

큰 자양분이 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결국 매 순간 몰입하여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얻는 것이 있고,

그런 경험들은 어느 순간에는 연결되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것 같다.



인생은 그야말로 ‘Connecting the dots’다!

작가의 이전글유쾌함과 세심함의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