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이토록 가벼워졌다
지겹도록 나를 알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그 말대로 애써 보기도 했지만
도무지 ‘나를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나를 몰랐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해 보려 해도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 이유는 분명하다.
나는 오랫동안 완벽주의라는 방식으로
나를 대하고 있었다.
‘잘해야 한다’는 기준을 먼저 세워두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감정은 애써 무시했다.
힘들어도 괜찮아야 했고,
우울해도 밝아야 했으며,
두려워도 겁내지 않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외면당한 마음은 반드시 사고를 친다.
아무것도 주지 않은 채
혼내고 다그치기만 한 마음은
임계점을 넘는 순간 더 이상 나를 따라주지 않았다.
내 마음은 반항했고,
그 반항은 주로 과식과 과음의 형태로 나타났다.
정서적으로 스스로를 돌보지 않으니
비교적 쉬운 방식으로
결핍을 메우려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우연히 '마음챙김'을 접하게 되었다.
전문가와 함께하는 마음챙김 모임에서
나는 처음으로 '느끼는 대로 말해도 되는 공간’을 경험했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내 감정을 말로 꺼내는 일 자체가 낯설었다.
하지만 반복해서 연습하다 보니 조금씩 익숙해졌고,
그럴수록 '나’라는 사람이
점점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울할 때는 우울하다고,
불안할 때는 불안하다고
좋고 나쁨으로 평가하지 않고 인정해 주자
비로소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기쁜 사람인지,
어떤 일을 할 때 유난히 버겁고 힘든 사람인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전에는 누군가 큰 성취를 이루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하기도 전에
"나도 저 사람처럼 되어야겠다"고
스스로를 바꾸려 했다.
하지만 나를 알게 되자
"저 방식은 나와 맞지 않는다"는 판단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출 수 있게 되었다.
어차피 내가 갈 길이 아니니 부럽지가 않았다.
선택도 한결 편해졌다.
예전에는 작은 물건 하나를 사는 일에도,
식당을 고르고 여행지를 정하는 일에도 후기에 의존했다.
내 기준이 없으니
남들이 좋다는 선택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안전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다르다.
나를 기준에 두고 선택하니
불필요한 고민과 감정 소모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돌아보면 나는 나를 알기 위해
특별한 답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느끼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었을 뿐이다.
평가하지 않고, 재단하지 않고,
고치려 들지 않고 그대로 받아주자
마음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었다.
나를 아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이토록 가벼워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