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8시 47분. 퇴근길 지하철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보자마자 가슴이 철렁했다.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약사님이 전화를 한다는 건, 분명 급한 일이 있다는 뜻이다.
"변호사님, 죄송해요. 이 시간에... 그런데 정말 급해서요."
목소리에 떨림이 섞여 있었다. 베테랑 약사가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처방전에 적힌 용량이 이상해서 의사 선생님께 확인 전화를 드렸는데, 그분이 화를 내시면서 '약사가 처방에 간섭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이 용량대로 조제하면 정말 위험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처방전 한 장의 무게
약사에게는 검수할 의무가 당연히 인정된다.약사법 제23조의2에서는 "약사는 제23조제3항에 따라 의약품을 조제하는 경우에는 다음 각 호의 정보를 미리 확인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환자와 약사 간 조제계약의 취지상으로도 약사에게는 검수의무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법리상으로는 명확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약사가 약을 검수해서 의사에게 통지하더라도 의사는 "약사가 왜 처방에 간섭하느냐"고 화를 내고, 약사는 "환자 안전을 위해서"라고 항변하겠지만, 의사와의 관계, 병원과의 유대,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틀렸으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감 속에서 "그냥 조제할 걸 그랬나"라고 고민하는 경우도 많다.
나 역시 약사로서 약사의 고충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 경우에는 단호하게 말했다.
"조제하지 마세요. 법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당신이 옳습니다."
책임의 경계선에서
"그런데 변호사님, 만약 제가 조제를 거부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제가 잘못 판단한 거였으면 어떡해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약사들이 얼마나 외롭게 판단해야 하는지,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기 때문이다.
변호사의 관점에서는 명확하다 약사가 합리적 의심을 갖고 조제를 거부한 경우, 설령 나중에 처방이 정확했다고 밝혀져도 약사에게 어떠한 법적 책임이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명백히 잘못된 처방을 그대로 조제했을 때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
"약사님, 당신은 환자 안전의 마지막 보루입니다. 그 책임을 다한 것에 대해 법적 문제가 될 일은 없어요."
퇴근길 지하철에서의 생각
전화를 끊고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생각에 잠겼다. 이런 상황이 왜 계속 반복될까?
의사는 처방권의 독립성을 주장하고, 약사는 조제권의 전문성을 내세우지만, 정작 그 중간에서 환자는 혼란스러워한다. "선생님들끼리 의견이 다른데,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문제는 시스템이다. 의사와 약사가 대등한 의료진으로서 협력해야 한다는 인식이 부족한 현실, 처방 검토를 '간섭'으로 받아들이는 문화, 그리고 무엇보다 환자 안전보다 인간관계를 우선시하게 만드는 구조.
법이 말하는 것과 현실이 요구하는 것
법리는 명확하다. 약사는 처방전을 검토할 권한과 의무가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 권한을 행사하는 약사는 종종 '까다로운 사람', '협조적이지 않은 사람'이라는 낙인을 받는다.
그래서 나는 약사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전문성을 의심하지 마세요. 법이 당신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의사들에게도 말하고 싶다. "약사의 처방 검토는 간섭이 아니라 협진입니다. 환자 안전이라는 공통 목표를 위한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의 전화
다음 날 오전, 그 약사님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변호사님, 어제 그 처방... 의사 선생님께서 용량을 잘못 적으셨다고 연락 주셨어요. 제가 지적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고마워하시더라고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동시에 씁쓸했다. 만약 그 약사가 의사의 압박에 굴복해서 그대로 조제했다면? 만약 환자에게 부작용이 발생했다면?
시스템을 바꾸는 일
약사에서 변호사로 전업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현실을 바꿔보고 싶어서였다. 개별 사건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인 시스템을 개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의사와 약사가 서로를 견제하는 관계가 아니라 협력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처방 검토를 권한 다툼으로 보지 말고, 환자 안전을 위한 필수 과정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문제로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해야 하는 약사가 더 이상 없기를 바란다. 당당하게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의료 환경이 만들어지기를 간절히 꿈꾼다.
오늘도 나는 법정에서, 상담실에서, 그리고 새벽 전화 너머에서 이 꿈을 위해 작은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