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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아노 치는 변호사 Jan 16. 2016

아빠의 카레

나를 사랑한 사람들, 내가 사랑한 사람들

내가 기억하는 유년 시절은 피아노로 시작된다. 유치원에 들어간 언니가 먼저 피아노를 쳤다. 언니는 피아노를 치고 나는 치지 못하는, 그 기회불균등 상태의 시정을 요구하며 무척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5살에 피아노 학원에 줄래줄래 따라가서 피아노를 시작했다. 피아노를 작은 아파트 마루 끝에 들여 놓던 날이 아직도 기억난다. 피아노 의자에 올라 앉아 피아노를 동당거리다 보면 피아노 의자가 자꾸 현관 쪽으로 미끄러져 기울어졌다. 목수 아저씨를 불러 의자다리가 현관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작은 나무 턱을 붙여 달라고 했다. 새로 만들어 붙인 나무 턱에 피아노 의자 다리를 딱 갖다 붙이고 의자 위에 올라앉아 치기 시작한 피아노를 나는 그 이후로 1989년까지 약 15년간 쳤다. 피아노 실력은 점점 늘었다. 무엇보다 처음 본 악보를 바로 치는 초견(初見)이 빨랐다. 자연히 반주자가 급히 필요한 곳에서는 나를 찾으시곤 했다. 반주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당시 나는 피아노 반주하는 사람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 즉 지각을 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과제이고 시간을 지키는 것이 제일의 가치인 것으로 여겼다.


어머니는 그때의 나를, 피아노 위에는 피아노 책, 책상 위에는 교과서, 방바닥에는 읽을 책을 펴놓고 세 장소를 번갈아 다니면서 지내는 아이였다고 표현하신다. 어려서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여 나중에 커서 화가가 될 것인가 피아니스트가 될 것인가를 놓고 잠시 고민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주위에서 화가를 본 적이 별로 없고 피아노가 무슨 운명인 것처럼만 여겨져 초등학교 3학년 이후 내 꿈은 시종일관 피아니스트였다. 후에 예원학교에 다닐 때 같은 반에 있는 미술과 친구들이 미술 시간에 내 그림을 보고, 우스갯소리로 “지영아, 피아노 치다가 잘 안 풀리면 미술과로 전과(轉科)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피아노 외의 것은 초등학교 때나 그때나 안중에 없었다.

그렇다고 부모님께서 적극적으로 밀어주시는 것은 아니었고 피아노 치는 것을 말리지만 않으실 뿐이어서 - 더 정확히는 밀어준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셔서 - 나는 그저 피아노 학원에 가서 피아노를 배우는 것이 전부였다. 내 안에 들어있는 꿈틀거리는 가능성을 더 이상 밖으로 끌어내 주지 못하는 학원 선생님의 가르치는 방식에 어느정도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 딱히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나중에 같이 음악공부를 하게 된 동기들이 그때의 내 나이에 이미 상당한 수준의 레슨을 받으며 일찌감치 음악학도로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 당시에는 전혀 몰랐고 이를 알았다 해도 시도해 볼 여건 또한 물론 아니었다.   



- 피아노 치는 변호사, Next 中 '세상으로 통하는 문, 피아노' 편을 발췌한 글이다. 그러니까 여기까지는 2005년에 쓴 글이다.



피아노 이야기는 하자면 끝이 없다.

2005년, 그 때까지의 내 삶을 전부 한 권의 책으로 써야 했으므로, 앞으로 갈 길이 먼 마당에 방년 5세 소시적 피아노 이야기를 구구하게 쓸 수가 없었다.

내가 현관 끝에 나무턱을 붙이던 그 날을 특별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딴 데에 있다.

그날 목수 아저씨는 나무 턱을 마루와 현관의 경계선에 붙인 후,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대패로 나무턱의 모서리를 모두 뭉툭해 질 때까지 다듬어 주셨다.  엄마는 그렇게까지 하실 것 없다고 손사래를 치셨는데도, 아저씨는 내가 잘못 밟거나 손을 대어도 다칠 일 없도록 매끈매끈 둥글둥글해 질 때까지 대패질을 멈추지 않으셨다.

목수아저씨의 그 모습을 본 엄마는 방으로 들어가셨다.  지갑에서 천원 짜리 2개를 집었다가 다시 3개를 집었다 망설이시던 엄마는 결국, 2천원을 손에 쥐고 천원짜리 한 장은 따로 주머니에 넣으신 채로 방에서 나오셨다.

그 날 아저씨는 노동의 대가로 3천원을 받고 가셨다.

지금의 화폐가치로 표현하자면 3만원 정도의 무게로 느껴졌던 3천원.

피아노 치는 데에 왤케 돈이 들지... 하고 생각했던 나의 조바심의 시작이 아마 그 날이었지 싶다.

- 정작 피아노 사 주실 땐 비싼지 뭔지 모르고 좋아 날뛰다가. 쯧.   


1학년때인가, 학원에서 단체로 피아노콩쿨에 나갔다.

이름 없는 대회로, 호텔에 피아노 한 대를 가져다 놓고 여러 학원에서 줄줄이 아이들이 출전하여 누구나 상장 하나씩 안겨받는, 정신없는 행사였다.

연주를 마친 나는 아빠 손을 잡아 끌며 배가 고프다고 하였고,

아직 언니가 연주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때라 호텔 밖까지 식당을 찾으러 나갈 시간이 안 될 듯 하여 아빠는 나를 데리고 호텔 안에 있는 레스토랑에 들어서셨다.

메뉴판에서 내가 먹을 만한 음식은 카레 정도였던 것일까, 아빠는 카레를 시켜 주셨다.

알라딘의 램프와도 같이 생긴 그릇에 밥과 따로 담겨진 카레를 나는 그날 처음 먹었더랬다.

아빠는 음식을 시키지 않으셨다. 우리아빠아빠아빠.....

계산할 때 보니 카레가 3,500원. 넌 또 왜 이리 비싸다니.

언니와 엄마가 있는 대회장 쪽으로 다시 돌아온 후 나는 엄마에게 이 카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정확히는 35년 동안 이 카레 이야기를 엄마한테 하지 못했다.

나는 2012년 겨울, 그 때의 나만한 딸아이를 둔 엄마가 되어서 비로소 친정어머니한테 입을 열었다.

내사랑 지니가 튀어나올 것 같은 그릇에 담긴 카레를 밥에 홀랑 부어서 쓱싹쓱싹 비벼 먹었노라고.

기억력 오백만년인 별난 딸의 이야기를 들으시던 엄마는 눈을 껌벅이신다.  얘가 이 이야기를 왜 하나, 싶으신 표정이었다.

그 날 아빠는 카레를 안 드셨어.

그리고 그 카레는 3천 5백원이었어.

난 더 이상 이야기를 잇지 못했다.

친정집 마루 창 밖으로 겨울산, 눈덮인 나무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남역 내 사무실 부근에 맛난 카레집이 있다. 카레 치고 가격이 센 편이다.

사무실 근처에서 만나는 손님들께, 그 분들이 메뉴에 동의하는 한 주로 카레를 대접한다. 그 때마다 나도 울아빠의 카레를 함께 먹는다.  


- 여기까지는 2014년 9월 12일에 블로그에 책을 발췌해 올리면 덧붙인 글이다.



작게 방송을 하나 하려고 준비 중이다. 처음에는 지인만 듣는 수준의 방송이겠지만(지인도 안 들으면 어쩌지?^^), 낡은 꿈 목록 중 하나의 체크박스에 표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요즈음 팟캐스트 방송이 6만개라고 하니 별 일도 아니지만, 나는 이렇게 또 무언가를 즐거이 시작해 본다.  

방송에 관하여 조언을 주신 분이 계셨는데, 나중에 손주들이 "이 방송, 우리 할머니가 하셨대."하게 될 그 모습을 생각하며 방송을 해 보라고 하셨다. 내게 통찰을 주는 귀한 말씀이셨고, 나는 오늘 그 문장을 당분간은 이렇게 대치한다. 우리 아버지가 내 방송을 듣고 기뻐하실, 그런 방송을 하려고 한다. 그러면 아마 최선의 방송이 될 것 같다. 최선이 쌓이면 어느 새 최고도 되더라. 늘 그랬고, 그러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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