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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성영 변호사 Jul 07. 2021

유죄인 피고인을 위한 선고유예 변론

과거 내가 어쏘 변호사로 근무하던 시절,

연구비 유용 혐의(사기)로 기소된 모대학 교수의

1심 형사재판 변호를 맡은 적이 있었다.


내가 위 사건의 변호를 맡은 시점은

재판장이 검사에게 공소장변경을 명령하여

공판검사가 재판장이 불러주는대로

'받아쓰기'를 하여 공소장을 변경한 직후였다.


즉, 현 공소장에 기재된 법리로는 사기죄의 피해자가 명확히 특정될 수 없어 유죄의 판결을 선고하기 어려우니, 재판장이 불러주는대로 공소장 내용을 변경하여 오면 바로 변론을 종결하고 유죄의 판결을 선고하겠다는 말이었다.


법리상 무죄는 될 수 없는 사안이었고, 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내려지면 교수직 면직이 확실시 되는 상황이었다.


위 사건은 통상의 연구비 유용 사건과는 달리, 교수가 연구비를 빼돌려 사적으로 착복을 하거나 편취를 한 것은 전무하다시피 하였고, 그 대부분이 학생들의 장학금과 식비, 용돈, 용역비 등으로 지출이 되었던 사안이었는데, 다만 산협단에 연구비 지급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일부 절차상의 하자가 기망으로 의율되었고, 감사원 감사에서 문제가 되어 검찰 고발로까지 이어지게 된 사건이었다.


사회적 비난가능성은 없거나 또는 미약한 반면, 법리상으로는 유죄가 확실한 사건에서 피고인을 어떻게 변호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나는 일주일 가량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다.


법리상 유죄가 확실한 피고인을 위해 무죄의 변론을 하는 것은 내 양심에 반하는 것이었고, 그렇다고 피고인을 그대로 두게 되면 유죄 판결의 선고에 따라 교수직으로의 복직은 물거품이 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과연 이 사건에서의 정의(공의)는 무엇일까?


이 사건에서의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고,

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기도하며 성경을 보던 중에 간음하다가 붙잡혀 온 여인을 살리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묵상하게 되었는데, 그 때 내가 받았던 전율과 망치로 머리를 크게 한 대 맞은 것과도 같았던 그 느낌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성경 말씀을 묵상한 끝에, 내가 내리게 된 결론은 바로 선고유예의 판결을 구하는 변론이었다.

(선고유예의 판결을 받게 되면 교수직으로의 복직도 가능하다)


'유죄인 피고인을 위한 선고유예 변론'


나에게는 수 많은 사건 중 한 사건일 수 있지만 피고인에게는 이 사건이 인생의 전부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의 혼과 진심을 담아 변론요지서를 썼다.


이하는 당시 변호사 초년생이었던 내가 피고인을 위해 썼던 변론요지서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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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피고인의 사정 및 정상


피고인의 친할아버지는 목사님이셨습니다.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을 하시게 되었고, 복역 후에도 중국에서 항일 운동을 계속 이어 나가셨던바,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그 공을 인정하여, 현재 피고인의 조부께서는 대전 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어 계십니다.


피고인의 아버지는 **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로 33년간 재직하셨으며, 지금은 노부모가 되신 1922년생이신 아버지와 1931년생이신 어머니를, 피고인은 미국에 교환연수를 다녀온 단 1년만을 제외하고 평생 동안 봉양하며 모셔왔습니다.


피고인의 큰 아들은 올해 2월 육군 공병대대 운전병을 제대하고 **대학에 복학하였고, 작은 아들은 현재 공군 발칸(대공포)병으로 군복무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피고인의 사랑하는 아내는 1992년에 ****대학교수로 부임한 이래 지금까지 후학을 양성해 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피고인은 독립유공자이신 할아버지에게는 하나 밖에 없는 손자였고, 자신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에게는 지금도 그 누구보다 효심이 지극한 아들이며, 두 아들에게는 든든한 버팀목과도 같은 아버지입니다. 동시에 사랑하는 아내에게는 평생을 약속한 한 여자의 남편이기도 합니다.


기독교 모태 신앙으로 현재 교회에서 집사로도 봉임하고 있는 피고인은, 지난 세월 **대학교 공과대학의 교수로서 그 누구보다 성실히 책무를 수행하여 왔습니다.


처음 피고인이 **대학교 공대에 교수로 부임 하였을 때, 연구와 관련된 각종 모임에서 피고인을 만난 외부 사람들이 피고인이 건넨 명함을 대충 보고는 피고인을 ‘OO대학교’ 공대 교수로 오인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피고인은 그럴 때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이 **대학교와 **대학교 공대의 위상을 조금이라도 높여야겠다고 생각하였고, 그야말로 불철주야 연구에 매진하여, 에너지 분야에서만큼은 대한민국에서 독보적인 연구자로 손꼽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좀처럼 **대학교 공대와는 산학연협력계약을 체결하지 않던 여러 발주기관들에서도 피고인의 연구 실적과 탁월한 성과를 보고 **대학교 산협단과 연구용역계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발주기관 관계자들도 증언하였듯이 피고인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도 늘 발주기관들이 만족할만한 연구 결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피고인은 위 연구 결과들을 좀 더 학문적으로 의미 있는 것들로 만들고자, 그리고 대학원생들의 취업에도 도움을 주고자, 대학원생들에게 위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논문을 작성할 것을 독려하였고, 피고인의 지도하에 완성된 논문들은 다수의 논문공모전 및 논문경시대회에서 장관상 등의 상을 휩쓰는 쾌거를 올리게 되었습니다(별지1 수상목록).


그 결과 피고인은 지금까지 **대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수라 할 수 있는 44명의 석․박사를 배출하기에 이르렀고, 그 44명은 명문대 졸업생들도 들어가기가 결코 쉽지 않은 국내 유수의 대기업, 공기업 등에 전원 취업을 하였습니다(별지2 졸업생 취업 현황).


이 뿐만이 아닙니다. 피고인은 시간과 비용, 실비를 제하면 남는 것이 없는 각종 기관의 수많은 자문 요청에도 자신이 가진 지식과 재능을 기부한다는 일념, 그리고 **대와 연구실의 위상을 드높인다는 일념으로 거절함 없이 성실하게 응하여 왔습니다(별지3 자문목록). 2005년에는 우리나라의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의 타당성 평가를 위해 에너지 전문가 중 누군가는 이라크로 가야하는 상황이었는데, 그 때 당시 이라크는 전쟁 직후였던지라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았고, 이에 피고인은 오직 국가를 위한다는 일념으로 혼자 자원을 하여, 방탄모자와 방탄복까지 입고 이라크 내 한국군 부대에 머물며 소정의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습니다.


이렇듯, 피고인은 학자로서 그리고 교수로서 국가와 사회, 그리고 **대를 위하여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고 오직 연구의 외길만을 걸어왔기에(별지4 기타 활동 내역), **대학교 전․현직 총장을 위시하여 다수의 현직 교수들과 모든 연구실 졸업생들, 그리고 발주기관 관계자들에 이어 심지어 산협단의 단장과 직원들까지 모두가 한 마음으로 피고인에 대한 선처를 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2천 년 전 이스라엘의 한 작은 마을에서 간음죄를 범한 여성이 사람들에 의해 예수님 앞으로 끌려 온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율법으로 간음죄를 범한 사람은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송사하고 돌로 쳐 죽이려 했던 무리들을 향하여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엄존하는 법을 무시한 것도, 그렇다고 그 여자에게 죄가 없다고 하신 것도 아닌 위 말씀은, 유죄를 선고하게 되면 여인이 돌에 맞아 죽게 되는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살리기 위해 형의 선고를 유예 하신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현재 피고인은 이미 사회적으로 사형을 당한 상태입니다. 천직으로 여겨 왔던 교수직에서는 해임을 당하였고, 평생을 바쳐 일구어온 연구실은 그야말로 공중분해가 되었습니다. 대학원생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화목하고 평화로웠던 가정에는 이제 수심만 가득합니다. 더 이상 노부모님을 뵐 면목도 없습니다. 수십 년간 연구해온 지식과 경험을 국가와 사회를 위해 활용할 수 있는 길마저도 차단이 되었습니다. 이는 국가적 사회적으로도 매우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피고인은 자신의 현 상황이 어찌되었든, 본인의 부주의로 행정 절차를 엄수하지 못한 점에 대한 잘못을 통감하고 깊이 뉘우치고 있습니다. 검찰이 주장하는 피해액에 대해서도 잘잘못을 떠나 전액을 산협단에 납입 한 상태입니다. 피고인은 전과도 없으며, 감사원의 무리한 감사에서 비롯된 이 사건이 다소 억울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모든 수사절차와 공판절차에 성실하고 정직하게 임하여 왔습니다.


우리 형법 제59조 및 제 51조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자격정지 또는 벌금의 형을 선고할 경우에 범인의 연령, 성행, 지능과 환경, 피해자에 대한 관계, 범행의 동기, 수단과 결과, 범행 후의 정황을 참작하여 개전의 정상이 현저한 때에는 그 선고를 유예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바, 가사 피고인의 이 사건 행위가 유죄로 판단된다 하더라도, 앞서 말씀드린 피고인의 사정과 정상을 모두 혜량하시고 허용되는 최대한의 관용을 베푸셔서 그 형의 선고를 유예하여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리하여 피고인이 남은 일생을 다시 사는 인생이라 생각하고 오직 국가와 사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뿔뿔이 흩어진 대학원생들을 모아 다시 연구실을 재건하고 가뜩이나 어려운 우리나라의 에너지 수급 상황에 피고인이 가진 지식과 능력을 활용할 수 있도록, 그리고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남은 여생동안에도 노부모님을 봉양하고, 두 아들과 사랑하는 아내에게 앞으로의 시간 동안만이라도 떳떳한 아버지로 그리고 남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피고인에게 마지막 기회를 열어 주실 것을 다시 한 번 간청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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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위 변론요지서의 제출로(비록 성경말씀을 인용한 밑줄 친 부분은 대표변호사님의 최종 검토 과정에서 삭제가 되어 제출 되었지만) 피고인은 기적적으로 선고유예의 판결을 받게 되었고, 현재 피고인은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후학 양성에 힘 쓰고 있다.


내가 알기로, 위 사건은 상하급심을 통틀어 연구비 유용 혐의로 기소된 사건에서 선고유예의 판결이 내려진 첫 사례로 기록되게 되었다.


#정성영변호사 #했다하면승소 #선고유예 #형사변론 #교비횡령 #연구비횡령 #연구비유용 #변론요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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