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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성영 변호사 Jul 11. 2021

보험가입은 2억원, 그러나 지급해야 할 보험금은 6억원

항소심 첫 변론기일을 일주일 가량 앞둔 시점에 항소심 재판장님으로부터 사무실로 전화가 왔다. 재판 도중에 증거방법 내지 소송지휘와 관련하여 전화가 온 경우는 있어도, 첫 변론기일이 열리기도 전에 전화가 온 것이어서 왜 전화를 하신 것인지 나로서도 매우 궁금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항소심 재판장님께서 나에게 하신 첫마디가 "변호사님께서 제출하신 항소이유서를 읽어보았는데 항소이유서를 정말 훌륭하게 잘 쓰셨습니다"였다.


설마 항소심 재판장님께서 서면 잘 썼다고 칭찬하시려고 나한테 전화를 하신 걸까라는 의아함과 궁금증이 드는 찰나에, 또다시 연이어 "정말 서면에 대해서는 제가 더 언급할 것이 없을 정도로 아주 잘 쓰셨습니다"라고 하시고는, "저도 이 분야에 대해서는 잘 몰랐는데, 변호사님께서 제출하신 항소이유서를 보고 이번에 많이 배웠습니다"라고 하셨다.


어안이 벙벙하였고, 지난 변호사 인생을 통틀어서 이렇게 대놓고(?) 그것도 항소심 재판장님으로부터 재판을 시작하기도 전에 위와 같은 칭찬을 받은 경우는 처음이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이에 내가 "과찬이십니다 부장님"이라고 답변하자, "서면은 더 안 내셔도 될 정도로 이미 제출하신 항소이유서로 충분합니다"라고 하시고는, 전화하신 두 번째 목적(?)을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제가 이 항소이유를 그대로 인용하는 경우 판결 주문과 이유는 어떻게 선고해야 하는 것이지요?"


어떻게 항소심 재판장이 저런 질문을 변호사에게 할 수 있냐고 의아해하실 분이 있으실지 모르겠으나, 이는 위 소송의 독특성과 특이성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가 갈 수 있는 대목이다.


위 소송은 가스폭발사고의 피해자에게 수천만 원의 보험금을 지급한 A보험회사(원고)가 위 가스폭발사고를 일으킨 가스회사B(피고1) 및 B가 가스사고배상책임보험을 가입한 C보험회사(피고2)를 상대로 구상금지급청구소송을 한 사안이다.


위 사안에서의 핵심 쟁점은, B가 C와 체결한 보험증권에는 보험금 한도액이 2억 원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관련 법령에는 그 보험금 한도액의 하한을 3억 원으로 하도록 규정하고 있어서, 과연 C가 지급의무를 부담하는 보험금 한도액은 얼마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위 소송에서 피고1인 B를 대리하여, 1심에서 C가 지급의무를 부담하는 보험 한도액은 보험증권의 기재에도 불구하고 3억 원이라고 주장하였고(다툼 없는 2억 원에 대해서는 C가 이미 공탁을 한 상황), 따라서 C가 추가로 1억 원을 공탁하지 않는 이상, A의 청구에 대해서 C도 B와 연대하여 그 지급의무를 부담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A의 피고"들"에 대한 청구가 그대로 인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이에 반해 C는, 이미 자신들이 지급 의무를 부담하는 2억 원 전액을 공탁하였으므로 자신들은 더 이상 보험금 지급 의무가 없고, 따라서 A의 C에 대한 청구는 기각되어야 한다고 다투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위 사례는 전례가 없는 사안이었고, 치열한 법리 공방 끝에, 1심은 나의 손을 들어주어, 원고의 피고"들"에 대한 청구를 모두 인용하는 주문을 선고하면서, 판결 이유에 C가 지급의무를 부담하는 보험금은 3억 원이라고 판시를 하였다.


즉, 주문상으로는 우리가 패소한 것처럼 보이지만(애당초 A의 청구 자체에 대해서는 다툼이 없었다), 그 이유상 내지 실질상으로는 우리가 승소한 판결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위 1심 판결이 선고되고 나서 좀 더 연구해보니, C로부터 3억 원을 더 받아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법리 검토 결과 C가 지급의무를 부담하는 보험금은 원심이 판시한 3억 원이 아닌 총 6억 원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1심에서의 실질적 승소에도 불구하고, 2심에서 C로부터 3억 원을 더 받아내기 위해 의뢰인인 B를 설득하여 항소를 하였고(항소권의 존부는 주문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주문상 패소자인 B는 얼마든지 항소가 가능하다), B가 항소하자 C도 항소를 하였다.


C는 1심 판결 선고 이후 1억 원을 추가로 공탁하였고, 항소이유서에서 원심이 판시한 3억 원을 모두 지급하였으므로 A의 C에 대한 청구를 기각하여 달라고 주장하였다.


나는 항소이유서에서 원심의 법리오해 및 일부 판단유탈을 지적하면서, C가 지급의무를 부담하는 보험금 한도액은 총 6억 원이라 할 것이므로, C의 1억 원 추가 공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C는 B와 연대하여 위 구상금 지급 의무를 부담한다고 주장하였다.


항소심 재판장님이 왜 위와 같은 질문을 하시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 그 내용이 다소 길어졌는데, 내가 재판장님께 드렸던 답변은 "재판부에서 저희 항소이유를 그대로 인용하시는 경우, 주문은 '피고들의 항소를 기각한다. 항소비용은 피고들이 부담한다'가 되어야 하고, 판결이유에서 'C는 총 6억 원의 보험금 지급의무를 부담한다'는 내용이 판시되면 됩니다"였다(즉, 우리 항소이유를 모두 받아들이는 경우 주문상으로는 항소기각이 선고되어야 했던 사안이었던 것이다).


내가 위와 같이 답변하자, 재판장님께서는 기다리셨다는 듯이 "그렇지요?"라고 하셨고, 이어서 전화하신 세 번째 목적을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대법원 판례는 찾아보니까 없는 것 같고, 혹시 제가 참조할만한 선례나 하급심 판결이 있으면 참고자료로 제출해 주시면 좋고, 만일 없다면 제출하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위 사안은 관련 대법원 판례는 물론이고, 하급심 판결도 전무한, 그야말로 최초의 사안이었고, 참조가 될만한 선례도 없는 사안이었다. 나는 아래와 같이 답변하였다.


"네. 재판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희 사안은 대법원 판례가 없는 사안이고, 하급심 판결도 항소이유서 제출 시점 기준으로 그때까지 제가 찾아본 바에 의하면 없었고 참조할만한 다른 선례도 없었으나, 혹시 있는지 더 찾아보고 만일 있다면 참고자료로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후 항소심 재판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는데, 나는 굴지의 대기업 보험회사인 C 내지 보험을 전문으로 하는 C의 소송대리인이 과연 내가 제출한 위 항소이유서에 대해서 어떻게 다투고 반박을 할지가 너무 궁금했다. 그만큼 법리적으로 반박의 여지가 없다고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위 항소이유서를 제출한 것이 작년 말이었는데, C는 그로부터 6개월이 경과하도록 위 항소이유에 대해 아무 반박을 하지 못하였고, 재판장님께서 항소심 변론기일을 두 번 속행하시면서까지 C의 소송대리인에게 위 항소이유에 대한 반박을 제출할 것이 있다면 제출하라고 하였음에도(C의 소송대리인도 반박 준비서면 제출을 위해 재판부에 속행을 구하였으면서도), C는 결국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였고, 그대로 판결선고기일이 잡히게 되었다.


그런데 C가 판결선고기일을 이틀 앞두고 변론재개신청을 하였고, 재판부에서 이를 불허하자, C는 돌연 판결선고기일을 하루 앞두고 "항소취하"를 하였다.


C의 항소취하로, A의 C에 대한 청구 부분은 항소심으로 이심되지 않고 원심에서 확정이 되어버렸고, 결국 A의 C에 대한 청구 부분이 더 이상 항소심에서의 심판대상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한 항소심 재판부는 'C의 항소취하로 인해 A의 C에 대한 청구 부분, 즉 C의 책임 부분은 더 이상 당심의 심판대상이 될 수 없게 되었으므로, A의 청구 자체에 대해서는 B도 다툼이 없는 이상 B는 A가 청구하는 구상금을 지급하고 항소비용은 각자 부담하라"는 취지의 화해권고결정을 내렸다.


청천벽력같은 결정이었다. 위 결정은 B에게는 무용무익한 결정이었을 뿐 아니라, 이대로 위 결정이 확정되어 버리면, C의 책임 부분에 대한 원심 판단 역시 이대로 확정되어버려, 추후 기판력에 관한 문제 등 복잡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위 항소심 재판 결과를 보기 위해 추정되어 있는 다른 여러 관련 사건들에도 일정한 영향이 불가피하였다.


나는 위 화해권고결정에 이의를 신청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재판진행에 관한 의견서"를 재판부에 제출하여, C가 지급의무를 부담하는 보험금 한도액이 총 6억 원이라는 판시를, C의 항소취하에도 불구하고 당심 판결 이유에서 설시하는 것이 법리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한 반드시 설시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위 이의신청에 따라 판결선고기일이 잡혔고, 결국 항소심 판결이  2주에 선고되었다.


결과는?


내가 제출한 의견서 내용 그대로, 그리고 앞서 재판장님과의 통화에서 우리 측 항소이유가 그대로 인용되는 경우 선고되어야 하는 주문과 이유라고 말씀드렸던 그 내용 그대로, 주문은 "피고(피고2의 항소취하로 "들"이 빠졌다)의 항소를 기각한다. 항소비용은 피고가 부담한다", 판결이유에서 "C가 지급의무를 부담하는 보험금은 총 6억 원"이라는 판시가 무려 3면에 걸쳐 매우 상세하게 판시되었다(나는 위 판결 선고 즉시 상고포기를 하여, 위 항소심 판결을 바로 확정시켰다).


위 판결로 인해, 위 가스폭발사고로 불의의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의 손해가 충분히 전보될 수 있게 되었다.


대한민국 변호사 최초로 2014년에 가스기능사 자격증(이 자격증을 따기 위해 약 1년간 주말마다 신도림에 있는 용접학원을 다녔고, 난생 처음 가스용접과 전기용접을 하게 되었다)을 취득(당시 대한변협에 공식 질의를 하여 답변을 받았다)한 이래  '가스'라는 한 우물을 판지 어언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물론 '가스'라는 우물만 판 것은 아니고 ^^ 내가 다루고 있는 여러 전문 분야 중 하나로 '가스'라는 우물을 초지일관 계속 파오고 있다).


위 항소심 판결을, 나를 믿고 이 사건을 맡겨주신 의뢰인(당초 의뢰인은 1심 판결에 만족하여 2심을 더 진행하지 않으려 하였고, 원래 어지간해서는 좀처럼 소송을 부추기거나 잘 권유하지 않는 나인데, 위 항소심만큼은 한번 해보자고 내가 권유를 하여, 결국 의뢰인이 나의 권유를 수락하고 항소심을 진행하게 되었다)과 앞으로 위 판결의 혜택을 받게 될 수많은 가스인들 그리고 구체적 사안에 따라 위 판결이 적용될 수 있는 보험가입자들에게 바친다.


그리고 "항소취하"라는 불의타 및 청천벽력 같은 화해권고결정을 받고 나서 밤을 새우다시피 하여 두 차례에 걸쳐 의견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바쁘신 중에도 위 쟁점(C의 항소취하에도 불구하고 C의 책임 부분이 항소심 판결 이유에 포함될 수 있는지 여부)에 관하여 같이 의논해주시고 좋은 아이디어를 주신 서강대 로스쿨 민사소송법 담당 김상수 교수님께 감사하다는 말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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