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무실에 입사한 지 얼마 안된 경력 10년 직원이 민사 판결 선고를 듣고 와서는, 이렇게 복잡한 반소 청구취지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지연손해금 기산일까지 완전히 동일하게 인용된 판결은 처음 본다며 놀라워 하였다.
위 사안은, 가스폭발사고로 인해 피해를 입은 피해자와의 사이에 화재보험을 체결하였던 대형 보험사가 화재보험금을 위 피해자에게 지급한 후, 위 보험금 상당을 가해자인 의뢰인에게 보험자대위로 구상 청구를 한 사안이었다.
위 사건을 의뢰받고 면밀히 법리를 검토한 끝에, 나는 보험사의 위 청구를 기각시키고 오히려 원고를 상대로 반소 청구를 해서 지금까지 의뢰인이 위 관련 사건 등에서 쓴 변호사비용 등의 모든 방어비용을 받아내는 것으로 변론방향을 정하였다.
이게 어떻게 법적으로 가능할까?
위 보험회사는 위 피해자와의 사이에 화재보험을 체결한 보험자임과 동시에 위 가스폭발사고의 가해자인 나의 의뢰인과의 사이에도 가스사고배상책임보험계약을 체결한 보험자였다.
그런데 내가 볼 때 위 보험회사는 보험계약상 자신이 지급책임을 부담하는 대물 보험금한도액을 다 지급하지 않은 상황이었고(물론 보험회사는 자신이 지급책임을 지는 대물 보험금한도액 전액을 이미 다 지급하였다고 다투었다), 위 보험회사가 위 사건에서 보험자대위로 구상청구하는 금액은 자신이 여전히 지급책임을 부담하는 잔여 대물 보험금액의 범위 내에 있었다.
즉, 위 보험회사는 나의 의뢰인에게 보험자대위로 인한 구상금채권을 가진 채권자임과 동시에 위 가스사고배상책임보험계약에 기초한 대물 보험금을 지급할 채무를 지는 채무자였던 것이다.
교과서에서만 보았던 바로 그 '혼동'의 법리가 적용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나는 재판부에 원고(위 보험회사)의 구상금채권이 '혼동'에 의해 소멸되었다고 주장하며 기각을 구하였고, 그와 동시에 상법 제720조 제1항에 기하여 의뢰인이 지금까지 위 가스폭발사고와 관련하여 지출해온 변호사비용 등의 방어비용(보험회사가 의뢰인에게 구상청구한 위 사건에서 의뢰인이 지출한 변호사비용까지도 모두 포함하여)의 선급을 반소로 청구하였다.
위와 같이 반소를 청구할 수 있었던 것은, 위 방어비용 역시 앞서 언급한 원고가 지급책임을 부담하는 잔여 대물 보험금액의 범위 내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쟁점이 혼재되어 있고 법리적 판단을 요하는 부분도 적지 않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너무나도 법리상 명확한 사건이었음에도 서울중앙지법에서는 위 사건을 무려 3년 동안이나 심리를 하였고 그 사이에 재판부도 2번이나 변경이 되었다.
특히 재판부에서 막판까지 고심하였던 것이 바로 위 '혼동'의 법리가 우리 사건에 적용이 될 수 있는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는데, 관련 대법원 판례는 딱 하나 정도만 있었고, 그 외에 우리 사건과 비슷한 타 사건에서 '혼동'의 법리가 적용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대법원의 심리가 무려 5년 넘게 진행 중에 있는 것이 있었다.
여차저차하여 두 번째 재판부에서 결국 변론을 종결하고 판결선고기일을 지정하였는데, 판결선고기일을 불과 얼마 앞둔 시점에 갑자기 두 번째 재판부에서 판결선고기일지정을 취소하고 기일을 '추후지정'하였다.
실무관에게 전화를 걸어 그 사유를 물어보니, 5년 넘게 심리가 진행 중인(도대체 언제 그 결과가 나올지도 가늠할 수 없는) 위 대법원 판결의 결과를 본 후에 이 사건을 진행하겠다는 취지라고 재판장님이 말씀하셨다고 하였다(그러나 이 경우에도 나의사건검색 및 전자소송에는 '관련 사건의 결과를 보기 위하여'라고만 기재가 된다).
해가 바뀌어 세 번째 재판부가 들어오게 되었고, 그 사이에 위 사건과 관련이 있는(그러나 혼동과는 관련이 없는) 타 사건들에서 거듭 승소를 하게 되었는데, 나는 위 관련 사건의 승소 판결문을 첨부하여 세번째 재판부에 기일지정신청을 하였다.
"관련 사건"의 결과를 보기 위하여 기일이 추정이 되었었는데, 이제 "관련 사건"의 결과가 나왔다는 이유였다.
물론 두 번째 재판부가 내심으로 의도한 "관련 사건"은 위 대법원 사건이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부로 표출되지 않은 두 번째 재판부의 내심의 의사에 불과한 것이었고, 나는 '혼동'의 법리가 우리 사건에 적용이 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오히려 그보다 더 관건은 '위 보험회사가 보험계약상 자신이 지급책임을 부담하는 대물 보험금 한도액을 다 지급하였는지의 여부'에 관한 것이라는 입장이었는데, 바로 위 쟁점에 대한 법원의 판결들(나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판결들)이 연이어 나오게 되었고, 심지어 위 판결에 대해서는 위 보험회사도 항소를 포기하여 확정이 되었으므로, 더 이상 우리 사건의 기일을 추정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관련 사건"의 결과가 나왔으므로 변론기일을 지정하고 바로 결심을 한 후 판결을 선고하여 줄 것을 재판부에 요청하였다.
재판부는 바로 변론기일을 지정하였고, 해당 변론기일에 결심을 한 후(세번째 재판장님께서 결심을 하시고 나서, 뒤돌아 서서 법정을 나서는 나를 갑자기 부르시고는 '불특정 다수의 피해자들이 있는 이런 사건은 판결이 신속하게 선고가 되어야 하는데 너무 늦어지게 된 점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셨다), 판결선고기일에 내가 주장한 '혼동'의 법리를 적용하여 본소 청구를 기각하고, 반소 청구는 지연손해금 및 그 기산일까지 그대로 100% 다 인용하는 내용의 판결을 선고하였다(만일 반소청구만 있었다면 위 판결문의 '청구취지' 기재 란은 "주문과 같다"라고 기재가 되었을 것이나, 기각된 본소청구도 있으므로 "주문과 같다"라고는 기재할 수 없어서 위와 같이 "별지 청구취지 기재와 같다"라고 기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