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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야 Laya Dec 21. 2024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제1편 : 전쟁과 <걸리버 여행기>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네안데르탈인의 멸종도, 인더스강을 처음 마주한 알렉산드로 대왕도, 모든 길이 통했던 로마도, 몽골 초원을 누비던 유목민들도, 대공황을 맞아 일어난 파시즘 정권들도, 이 글의 제목도,

역사이자, 전쟁이다.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하는 거인국 '브롭딩낵'의 왕은, 인류 문명 그 중에서도 해가 지지 않는다던 대영제국에 대한 걸리버의 설명을 듣고는 인간을 간단히 정의내린다. '벌레'. 1726년작인 <걸리버 여행기>를 지금까지 읽어왔을 무수한 '인간'들은 '벌레'라는 단어에 치가 떨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수긍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수긍의 이유는, '문명'이라는 단어로 '합리'를 향햐는 듯 보이던 세계가 힘과 폭력의 발전으로 압도적인 '불합리'를 향했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합리'가 어느덧 힘과 폭력의 명분이 되었을때, 역사적이게도 가장 많은 생명이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사라졌다. 문명이 문명을, 역사가 역사를, 인간이 인간을 없앴다. '불합리' 였다.


국가는 실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일 뿐이다. 국가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인식은, 실제로 국가란 국민이 만들어낸 '개념'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한다.

영토 또한 실재하지 않는다. 실재하는것은 흙이고, 풀이고, 나무이고, 그 사이를 날으는 새들이며, 영토 또한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일 뿐이다. 나도 너도 걸으며 밟는 그 흙이 곧 실재하는 것이며, 인간이 지도에 그린 그 선은 만들어진 '개념'일 뿐이다.


실재하는 '생명'은 그 어떤 '개념'보다도 소중하다. 실재하지 않는 '국가'의 '영토'를 위해, '실재하는 것'중에서도 가장 귀중한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압도적인 '불합리'에 해당한다. 전쟁이다.


그 '불합리'를 우리는 뉴스를 통해 일상처럼 보고 있다. 발칸반도와 중앙아시아 사이의 저 풍요로운 땅에, 측정할 수 없는 '불합리'가 난무하고 있다.


가상의 두 인물의 시선을 빌려, 이 '불합리'를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는, 러시아 징집병이다. 러시아에선 지난 9월 30만에 달하는 예비군에 동원령을 내렸다. 최근 이슈화된 미국 국방부 문건에 따르면, 이번 전쟁동안 최대 22만 3천명에 달하는 러시아군이 죽거나 다쳤다. (우크라이나군 사상자의 두배에 달하는 수치다.)고향을 떠나 타국 땅에서 '영토'를 위해 싸우다 죽어간 그 '생명'이, 바꿔선 안되는 그 맞바꿈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기에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그들을 징집한 '국가'도, '영토'라는 목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젊은 죽음만이 있었을 뿐이다.


둘째는, 우크라이나 민간인이다. 아파트에도, 백화점에도, 사람들이 몰린 기차역에도 어김없이 러시아군의 미사일이 떨어졌다. 마리우폴 그 평화롭던 도시는 형체를 알 수 없을만큼 파괴되었고, 수십만 발의 포격으로 만들어진 격전지 바흐무트의 풍경은 마치 달의 표면을 보는 듯 크레이터로 가득하다. 키이우, 수미, 부차, 하르키우, 이지움, 리만, 헤르손까지, 우크라이나군이 탈환한 도시들에는 러시아군에 의한 고문과 학살의 흔적이 남았다. 총을 들지 않은, 그들과 싸울 수 없는 민간인들에게, 러시아라는 이름의 '국가'는 죽음을 보냈다. 실재하지 않는 것이 실재하는 '생명'을 죽였다.


20세기가 21세기로 바뀌던 시기에 태어난 필자는 과거가 아닌 현재에서의 '전쟁'을 처음 접해서인지, 이 거대한 '불합리'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덧 '국제 정세'라는 것의 일부가 되어버린 이 전쟁은 일상처럼 뉴스에 오르내리며, '국가'간의 이해관계를 설명할때 '상식'의 하나처럼 언급되곤 한다. 그들은 '불합리'를 이해한 것일까, 그저 익숙해진 것일까. 나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걸까. 그런게 어른이라면, 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둔산동의 어느 백화점에는 우크라이나 국기를 나타내는 조명이 펼치고, sns에는 #으로 시작하는 우크라이나를 응원하는 무수한 메시지들이 펼친다. 그것들로는 이 죽음이 끝나지 않음을 알고 있을 어른들에게, 이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외교, 국가, 국제정세 같은 실재하지 않는 단어들을 빼고, 부디 생명과 죽음이라는 '본질'을 바라보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이 죽음을 멈추는데에 대체 어떤 이익과 명분이 필요할까.


우리를 '벌레'라 정의했던 거인국의 왕은 여전히 비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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