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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플러스 인생 Mar 07. 2022

"아스날 좋아하는 남편, 어떻게 생각해?"

ENFJ 남편과 ESTP 아내의 대화

 코로나 격리 중에 나눈 대화입니다. 일주일 가까이 집에 갇혀 핸드폰, OTT만 보던 부부. 말 많던 남편이 힘없이 리모컨을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가자 아내의 근심이 커집니다. 


 "괜찮아? 밥도 안 먹고... 아직 목 아프지?"


 배는 안 고픈데 힘이 없어. 남편은 비실거리다 침대에 쓰러집니다. 


 "열이 좀 있네. 아직 코로나가 다 낫지 않은 거야."


 남편은 코로나에 걸린 지 6일째. 아내는 5일째. 희한하게 두 사람은 짝수날에 아프고 홀수날에 기운이 다소 회복됩니다. 서로 상승과 하강이 엇갈리는 두 대의 롤러코스터처럼 두 사람은 번갈아가며 서로를 간호했습니다. 


 "더워. 괴로와" 오늘은 남편이 어리광을 부리는 날. 남편은 신생아처럼 웅크리고 아내의 무릎을 베고 누웠습니다. 


 "아스날 좋아하는 남편, 어떻게 생각해."


 뜬금없는 남편의 질문. "뭘 어떻게 생각해? 그냥 아스날 좋아하는가 보다 하는 거지." 


 ESTP 아내답게 쿨하게 답했습니다. 


 아스날은 런던에 연고를 둔 축구 클럽입니다. 박지성이 활약하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손흥민이 뛰고 있는 토트넘 핫스퍼의 라이벌 구단이기도 합니다. 한 때 대한민국 국가대표 박주영이 뛴 적도 있지만 모두가 잊고 싶은 기억입니다. 아무튼 남편은 아스날을 14년째 응원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게 좀 문제가 있는 거 같아."


 아내는 자세를 고쳐 앉습니다. 


 이놈의 ENFJ 남편이 뭔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아스날 좋아하는 게 뭐가 문제야? 요즘 잘 못해?"


 "요즘은 잘하고 있어. 어제도 이겼어."


 잘하면 내년에는 '챔스'에 나갈지도 몰라. 남편은 굳이 부연합니다. 챔피언스 리그, aka챔스는 그해 유럽 최고의 축구팀을 가리는 대회입니다. 각 리그 최고 수준의 팀들에게만 출전 자격이 주어지는데, 프리미어리그에서는 지난해 상위권 4팀이 챔스에 나갈 수 있습니다. 챔피언스 리그에 나가는 것 자체가 그 팀이 유럽에서 내로라할 강팀이라는 자격증명이 되는 셈인데, 아스날은 벌써 6년째 챔피언스 리그 진출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잘됐네 그럼. 챔스도 나가고. 뭐가 문젠데."


 "잘 된 일이라는 거. 그게 문제야. 챔스를 나가는 게 '잘 된 일'인 팀을 좋아한다는 게, 문제일 수 있다는 거야."


 "아하, 우승을 못하는 팀이라서 문제라는 거지?"


 아내는 결혼하기 전에는 아스날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새벽마다 축구 경기를 챙겨보는 남편을 이해하기 위해 아스날 선수들의 이름을 외웠습니다. 재미없는 축구 기사도 틈틈이 읽어보며, 아스날이 10년 넘게 우승하지 못한 것이 팬들에게 콤플렉스로 작용한다는 사실도 파악하고 있습니다. 


 "스포츠의 즐거움이 꼭 승자만 누릴 수 있는 전유물은 아니잖아? 무엇보다 아스날은 아름다운 축구를 하잖아. '재미없게 승리하기보다, 단 5분이라도 아스날다운 축구를 하는 것' 그게 아스날을 좋아하는 이유였잖아?"


 그리고 아스날 팬들이 그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개발한 논리도 숙지하고 있음을 남편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맞아. 정말 잘 알고 있네. 와이프는 내가 좋아하는 아스날에 관심을 많이 가져주는구나. 고마워. 그런데 더 이상 그런 이유로 아스날을 좋아할 수가 없어.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그런 선전 문구에 현혹된 거였어."


 어쩐지 남편의 반응이 기계적인 것 같아 못내 아쉬웠지만, 아프다고 징징대는 남편한테 뭐라고 했다간 또 삐질 게 뻔하니 오늘은 관용을 베풀기로 합니다. 


 "... 현혹된 거였다니?"


 "생각해봐. 나는 영국인도 아니고 런던에 살고 있지도 않아. 그런데 이역만리 지구 반대편에 있는 축구팀의 팬을 자처하고 있어. 그러면서 내 기분은 그 팀의 성적에 연동돼. 그 팀이 잘한 날은 기분이 좋아지고, 못한 날은 기분이 나빠지지."


 "그게 팬인 거잖아?"


 "어떤 사람들은 그게 어리석은 짓이라고 욕해. 예를 들어 한국사람이라면 왜 손흥민을 응원하지 않느냐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 심지어 아스날에는 지금 일본 선수가 뛰고 있어. 매국노라는 공격을 받기 딱 좋은 조건인 셈이야. 혹은 티비로만 볼 수 있는 외국팀을 좋아하는 건 사대주의라는 논리도 있어. 한국사람이라면 마땅히 K-리그의 팀을 응원해야 한국 축구가 발전한다는 주장이야."


 "별꼴이네."


 "물론 그런 사람들에게 반박하는 논리도 있어. 가령 K-리그는 수준이 떨어지기 때문에 볼 가치가 없다거나, 한국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한국 선수가 있는 팀만 응원해야 한다는 건 구식 민족주의, 국가주의적 사고방식이라는 거야."


 "전부 맞는 말이네. 그럼 그렇게 생각해버려. 그럼 되잖아."


 ESTP 아내는 여기서 더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남편이 ENFJ라는 겁니다. 또, 아프다는 핑계로 오늘따라 눈치도 없이 말을 계속할 참입니다. 


 "그게 그럴 수가 없어. 그 사람들의 논리 전부를 걷어내더라도 이런 문제가 남아. 앞서 말했듯이 내 기분이 아스날이라는 팀의 성적에 연동된다는 거야. 딱히 나와 연고가 있는 팀을 고른 것도 아닌데, 왜 세계 최강팀이 아니라 애매하게 늘 우승에 실패하는 아스날을 고른 걸까? 나는 나 스스로 기분을 일정하게 나쁘게 만드는 선택을 한 거나 다름없어. 이 선택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겠어?"


 "그럼 아스날을 좋아하지 마."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야."


 "그럼 어떤 문제라는 거야."


 아내는 약간 열 받았습니다. 


 "아스날 대신 우승하는 강팀을 좋아하면 그걸로 그만이잖아. 아니, 그냥 축구 자체를 그만 봐 버려. 사실 새벽마다 눈이 벌게져서 소리 지르는 꼴 보기 싫었어. 그래 놓고 주말 낮에는 내내 잠만 자고, 데이트도 데려가 주지 않았잖아."


 보통 이 지점에서 한발 더 나아가느냐, 마느냐가 그날 저녁을 망칠지 말지를 결정하는 선택지입니다. 마땅히 긴장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코로나 열병에 정신이 혼미해진 남편은 그대로 액셀을 밟아버립니다. 


 "이건 내가 좋아하는 많은 것들이 어떤 도덕적 기준에 따라 선택됐는가 하는 문제와 맞닿아 있어." 아내가 그게 또 무슨 개소리냐고 입을 열기 전에 남편은 먼저 선수를 치기로 합니다. "예를 들어 롯데 자이언츠, 아이돌 마스터, 진보 정당 같은 것."


 "잠깐, 거기서 진보 정당이 왜 나와."


 아내가 미끼를 물었습니다. 앞에 두 개는 아내를 현혹시키기 위한 허수아비에 불과했습니다. 


 "어떤 축구팀을 좋아하느냐는 건 취향의 문제잖아. 그건 기호야. 정당은 단순한 개인의 취향이 아니잖아. 그건 사회가 어떤 정치적 비전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야. 두 가지 문제를 섞어버리면 안 될 텐데."


 "그런데 실은 두 가지 문제는 연동돼 있어."


 "그게 말이 돼?"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면 납득하게 될 거야."


 "짧게 해 봐."


 아내는 오늘따라 인내심이 많은 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주일 내내 입 다물고 있던 남편이 오랜만에 입을 열어서 안심이 되는 데다, 아무튼 누운 채로 손가락 하나 못 움직이는 남자가 주둥이만 조잘대는 꼴이 귀여워서 용서해주기로 합니다. 


 남편은 짧게 할 자신이 없어서, 그냥 길게 말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정치에는 주류와 비주류가 있어. 집권하는 거대 정당과 집권 못하는 군소정당. 그런데 정치에서 거대 정당을 선택한 사람은 사회가 움직이는 방향의 주류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돼. 그렇지?"


 "그렇지."


 "군소정당을 선택한 사람들은 비주류가 돼서, 사회가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걸 감내해야만 하지."


 "그래. 하지만 우리가 채택하고 있는 정치체제는 민주주의야. 군소정당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소수의 의견도 어느 정도는 존중받을 순 있어."


 "그렇긴 해. 하지만 그 영향이 아주 제한적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겠지. 더군다나 한국 사회에서 군소정당이 발휘하는 영향력은 지난 20년 동안 계속해서 줄어들었어."


 "흠... 확실히 90년대 자민련이나, 2천 년대 초반의 민주노동당이 보여준 영향력을 현존하는 군소정당들 사이에서 찾아보기란 어려운 일이지. 그러나 안철수 현상이나, 청년세대의 등장 같은 새로운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잖아."


 "물론 한국정치는 역동적인 만큼 다소 이론의 여지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여기서는 그냥 대체적인 흐름과 경향성만 확인한 걸로 넘어가 줘."


 "알겠어. 넘어가 줄게."


 "정치와 마찬가지로 축구팀에도 주류와 비주류가 있지. 우승하는 강팀과 우승 못하는 약팀. 그런데 강팀의 경기는 훨씬 더 방영될 가능성도 많고, 즐길거리도 늘어나게 마련이야."


 "하긴 그렇겠지."


 "약팀의 경기는 방송 편성에서 빠지는 경우도 있고, 언론에서 주목하지도 않아. 해외축구팀 같은 경우는 소식조차 찾아보기 힘든 경우도 있어.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팀의 상품을 구하기도 어렵고, 함께 응원하는 동료를 만나기도 힘들지."


 "그러니까 강팀은 팬이 많고, 약팀은 팬이 적은 거잖아."


 "그렇지. 나는 이걸 '취향의 생존 가능성'이 낮은 거라고 표현하고 싶어."


 생존이라는 말까지 써야 하는가? 거기다 자기가 무슨 학자라도 된 것처럼 작은따옴표를 다는 것은 남편의 못된 버릇이다,라고 지적하고 싶은 아내였지만 오늘만큼은 남편도 아프니까 그냥 넘어갈까 했는데, 못 참고 그냥 말해버렸습니다. 


 "그걸 생존이라는 말까지 꼭 써야 돼? ㅎㅎㅎ 그리고 '취향의 생존 가능성' 뭐야, 당신이 무슨 교수야? ㅋㅋㅋㅋ 웃겨 진짜."


 남편은 적당히 구박받는 표정을 지은 다음 계속 말을 이어갑니다. 아내는 혀를 끌끌 찼습니다. 


 "조금 더 범위를 넓혀보면, 스포츠 종목 자체에도 주류와 비주류가 있어. 인기 종목과 비인기 종목. 예컨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K-리그 팬들은 프로야구에 모든 방송사들이 달려 들어서 전 경기를 다 중계해주면서, 왜 축구에는 그만한 관심을 쏟지 않는지 분개하곤 했어."


 "그건 시장성의 문제 아닐까? 야구는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보지만, 축구는 덜 보니까."


 "K-리그 팬들은 그게 닭과 달걀이 바뀐 거라고 주장하는 거지."


 "닭과 달걀? 아하, 덜 보니까 덜 중계하는 게 아니라, 덜 중계하는 바람에 덜 보게 된 거라는 이야기야? 흠... 글쎄... 과연 그럴까?"


 "뭐, K-리그 팬들은 신빙성이 높다고 믿을 거고, 야구팬들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겠지. 다만 여기서는 그 주장 하나하나를 입증해보자는 건 아니고, 그만큼 비주류 팬들은 취향을 유지하기 어려운 구조에 놓여 있다는 것만 짚고 넘어가자는 거야."


 "그래, 알겠어."


 "이런 구조는 마찬가지로 다른 종목 간의 관계에서도 발견돼. 이를 테면 올림픽 기간에 양궁이나 쇼트트랙 경기는 보기도 쉽고, 소식도 많이 찾아볼 수 있지. 반면에 비주류 종목은 중계 자체도 찾아보기 힘든 경우가 많아. "


 "그렇지만 컬링이나 봅슬레이처럼 재조명되는 종목도 있잖아."


 "그렇지. 그런데 그런 종목들은 한국 선수들이 출전해서 성적을 거두니까, 인기가 올라가서 그렇게 된 거지. 그러니까 인기 종목이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비인기 종목은 즐기기 힘든 종목으로 남는다는 현실은 변함이 없는 거야. 마찬가지로 씨름이나 핸드볼, 하키..."


 "그만, 예시는 그만 들어. 이미 이해했어. 어째서 같은 사례를 몇 개씩이나 열거하는 거야."


 "미안, 네가 충분히 납득하지 않은 것 같아서..." 아내 눈에 쌍심지가 켜지기 직전 남편은 얼른 말을 이어갑니다. 


 "비주류 종목, 비주류 팀을 좋아하는 사람의 운명은 비주류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의 운명과 다를 것이 없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지켜가기 어렵듯, 취향도 유지하기 힘든 거지."


 "어째서 그렇게 당연한 걸 이렇게나 길게 풀어서 설명하는 거야."


 "한 단계 더 나아간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바닥을 다지는 거라고 생각해줘."


 "여기서 어떻게 한 단계를 더 나아가겠다는 거야. 아웃사이더의 자부심을 내세우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아웃사이더, 그래. 나는 스스로 아웃사이더가 되겠다고 선택하는 행위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어."


 "도덕? 도~덕? 참나, 축구팀 좋아하는데 도덕까지 나와?"


 남편은 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는 불길해졌습니다. 한 번에 많은 말을 쏟아내려는 준비 동작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령 예술을 예시로 들어보겠어. 어떤 예술이 좋은 예술인지, 나쁜 예술인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 생각보다 짧은 문장이네. 예술에 좋고 나쁜 게 어디 있어. 모든 예술은 다 동등하지."


 "맞아. 그런 주장도 있을 수 있어. 하지만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는 영화와, 어느 대학 기말고사 과제로 제출된 팀 프로젝트 영상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해. 백보 양보해서 모든 작품에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사회가 '더 높은' 가치를  매기는 예술작품은 분명히 존재해. 사회가 뭐라고 하든 내가 좋은 작품만 보면 장땡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여기서는 일단 사회의 가치 기준이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치고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아내는 여기서부터 대략 고개만 끄덕여주기 시작했습니다. 


 "예술에도 주류, 비주류의 논리를 적용시켜보자고. 예술 중에서도 사회가 좋은, 유익한 예술로 평가하는 분야는 더욱 장려되겠지. 예술가의 수입도 늘어날 것이고, 사람들의 관심도 늘어날 거야. 이건 '시장'에서 그렇게 평가받기 때문이지. 마치 주류 스포츠팀이 더 인기를 끄는 것처럼. 그런데 많은 예술분야가 단지 '시장'의 기능만으로 유지되진 않아. 왜냐하면 비주류 예술 중에서도 사회에 꼭 존재하고 계속 공급돼야 할 예술 분야가 존재하기 때문이지. 찾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역할이 있는 국악, 지나치게 고급문화로 여겨지기 쉽지만 어쨌든 교양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는 클래식, 팔리지 않더라도 쓰는 사람은 계속 늘어나는 시, 상영관은 많이 잡지 못해도 마니아들이 열광하는 독립영화... 이런 예술분야는 '시장'에서 패배하더라도 사회가 정책적으로 돈과 사람과 시간과 장소를 제공해서 예술의 기능을 유지시키려고 애써. 어떤 사람들은 '그런 쓸데없는 곳에 왜 세금을 낭비하는 거냐?'라고 화낼지도 모르지만."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한다고 그래?"


 "있어, 그런 사람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주류, 비주류의 문제가 단순히 시장에서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로 결판이 나지 않는다는 거야. 시장에서 실패하더라도 사회가 그 분야를 '유익한 것' 나아가서 '필요한 것'이라고 합의하면 그 분야에 투자가 이뤄지고, 취향이 생존할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거지."


 "흠... 그러니까 취향에도 '좋은' 취향이 있고, '덜 좋은' 혹은 '나쁜' 취향이 있다 이거지."


 "맞아."


 "아스날은 좋은 취향이 아니야?"


 "최소한 남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취향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스날은 일 년에 대략 스무 번 정도 이기고 열 번 정도 비기고 열 번 정도 지거든. 비기는 날도 기분이 그럭저럭이라고 치면 나는 약 절반 정도의 확률로 기분이 좋지 못한 상태가 되는 거야. 그런 삶을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걸 어떻게 타인에게 납득시킬 수가 있겠어."


 "아니, 그런데 그만큼 기분이 좋은 날에는 더 크게 기분이 좋아지잖아. 그리고 대체로 아무리 잘하는 스포츠팀이라도 세 번에 한번 정도는 지지 않아? 아무 스포츠팀도 좋아할 수가 없다는 이야긴데 그럼."


 "더 잘하는 팀이 있는데, 굳이 못하는 팀을 응원하는 게 설득력이 없을뿐더러, 사회적으로도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는 거야. 사회 전체적으로 기분이 좋아질 수 있는데 기분이 나쁜 사람들이 늘어나는 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 한마디로 '잘하는 팀이 인기가 좋다'는 건 단순히 개연성이 높은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긍정적인 분위기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 도덕적 당위성을 갖는다는 이야기야."


 "그럼 뭐야, 약팀을 응원하는 사람은 도덕적 비난이라도 받아야 한다는 거야?" 


 "최소한 그 사람들을 비난하고, 놀리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 스스로는 도덕적 우월감을 느낄 거라는 이야기야. 우리나라에서 비주류 취향을 유지한다는 건, 끊임없는 비난과 놀림에 스스로를 직면시키는 위험을 초래해. 이게 단순히 우리나라만의 문제일까. 모르겠어. 다른 사회에 살아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최소한 대한민국에서만큼은, 어딜 가나 비주류 취향, 비주류 의견, 비주류 선택을 한 사람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도덕적 우월감을 갖고 비난하고 질타하는 풍경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건 인정하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지랖이 좀 넓은 편이긴 하지."


 "그래. 알다시피 나는 오타쿠잖아."


 "그래... 아까 지나가듯 아이돌 마스터 이야기를 꺼내길래 이 이야기가 왜 안 나오나 했어." 


 아내는 한숨을 쉽니다. 결국 이 모든 건 오타쿠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남편의 포석이었군요. 


 "맞아. 대한민국에서 오타쿠로 산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거든. 사람들에게 온갖 비난에 시달리게 되니까 말이야."


 "그럼 오타쿠로 살지 말...라고 하는 건 동반자로서 올바른 태도가 아니니까 다른 방향으로 조언을 하자면, 내가 처음에도 말했듯이, 남이야 뭐라고 하건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거 즐기면서 살면 되는 거 아니겠어?"


 이번에는 남편이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왜! 어째서! 대체 뭐가 복잡해!"


 사실 아내는 이미 오래전에 한계에 도달했지만 남편이 아파서 참는 겁니다.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하니까 문제야... 나는 비주류 입장을 선택하는 행위가 도덕적이라고 믿었던 사람이거든. 비주류 정당을 지지하고, 비주류 취향을 선택해야 한다고 믿었던 거야."


 "아니 그게 무슨! 도덕까지 갈 일이 있어!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거 좋아하고 살면 되는 거지!"


 "앞서 말했듯 '정치'는 그게 단순히 취향의 문제가 아니잖아. 어떤 사람들에게는 목숨이 걸린 일이야. 비주류 장애인, 비주류 동성애자, 비주류 여성, 비주류 지역, 비주류 국가, 비주류 학력, 비주류 업계, 비주류 나이인 사람들은 주류에 속한 사람들과 동등한 시민권을 보장받지 못해. 불평등한 사회를 평등한 방향으로 '진보'시키는 게 나의 신념이었거든."


 "그니까 왜 정치랑 취향을 섞냐고!"


 "조금만 더 들어봐 줘. 나는 올바른 정치가 사회를 진보시키는 거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고, 그 신념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군소정당을 지지했어. 그리고 진보가 이루어지는 과정은 대화와 토론에 이은 설득이라고 믿었어. 그러니까 비주류가 주류로 진입하고, 불평등이 평등해지기 위해서는 대화와 토론을 통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타인을 설득해야 하는 거잖아."


 "... 계속해봐."


 "그런데 지난 20년간 진보정당이 망했네?"


 "......"


 "......"


 "...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만 웃자. 그래서?"


 "응. 그러니까 지난 20년간 한국 정치에서 불평등을 보다 평등하게 만드는 진보 정치가 후퇴하고, 군소정당이 쪼그라들면서 내 문화적 취향들도 전부 잘못된 건 아니었나 돌아보게 됐다는 거야."


 "아스날이랑 오타쿠도 그럼 진보적 신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했다는 거야?"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것들과 막 뒤섞인 건 사실이야. 예를 들어 아스날 같은 경우에는 라이벌 구단보다 적은 돈을 써서 팀을 운영한다는 게 상당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게 사실이야. 아스날을 응원한다는 건 승리, 경쟁, 약육강식,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아름다움, 노동의 가치, 협동, 연대, 사회민주주의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혼동됐어."


 아내는 바로 최근에 아스날이 유럽 전체에서 손꼽힐 정도로 많은 돈을 투자해 선수단을 강화했다는 기사를 읽은 참이었기 때문에 비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습니다. 


 "1등 재벌 대기업이 미워서 2등 재벌 대기업 제품이나 해외 대기업 제품을 사는 소비자하고 비슷하네."


 "맞아. 그러니까 정치적 신념과 문화적 취향, 나아가서 상품 소비까지도 쉽게 연결되기 마련이잖아. 오타쿠도 비슷했어. '나'는 관심 없지만 '누군가'는 좋아하는 문화 영역에 사회가 좀 더 많은 관용을 베풀기를 바랐어. 그러면 우리 사회가 도덕적으로 더 나은 사회가 된다고 믿었어. 그래서 오타쿠 문화를 사람들에게 설파하고, 인정받도록 하기 위해 애썼어."


 "자기 취향을 대중에게 인정받고 싶었다는 거구나."


 "맞아. 그런데 게임도 마찬가지야. 사람들이 많이 하는 게임은 정해져 있어. 내가 즐기는 게임은 비주류야."


 "... 아이돌 마스터 말이지."


 "그렇지."


 "저기, 그렇게 확인하고 싶어서 꺼낸 말은 아니거든!"


 "... 아무튼 우리 사회는 정치적으로 보수화되는 만큼 문화적으로도 관용이 부족해진 게 아닌가 싶어. 자기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보다 배척하고, 취향이 다른 사람을 용인하기보다 공격하는 경우가 늘고 있으니."


 "그러니까 아이돌 마스터한다고 어디서 욕먹고 왔다는 이야기잖아..."


 아내는 슬슬 대화를 마무리짓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다 좋은데 너무 자기 연민이다."


 "뭐가?"


 "우선 '니가' 지지하는 정당이 망한 건 사실이지만 한국 사회가 정말로 보수화된 것인지는 따져볼 문제야. 그리고 문화적으로도 마찬가지. 주류 문화는 해체되고 있고 취향은 갈수록 파편화, 개인화되는 추세가 훨씬 강해진 것 같은데? 아스날이 우승하지 못하는 건 유감이지만 해외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채널도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고 있진 않아."


 "......"


 "오타쿠 문화도... 웹툰 시장도 커지고 애니메이션, 만화 같은 것도 볼 수 있는 방법이 늘어났잖아? 게임도 예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어. 좋은 게임, 나쁜 게임을 갈라서 생각하는 게 사회적으로 어쩔 수 없는 거라면 나쁜 게임을 선택하게 된 너의 구린 취향을 탓해.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걸 남들도 좋아해 주지 않아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잖아."


 "... 알아. 그래서 그렇게 살지 말았어야 하는 건가 후회 중이라는 이야기야."


 아이구!


 "내 인생, 36년을 잘못 산 게 아닌가 싶어서."


 "뭘 또 그렇게까지!" ESTP 아내는 이마를 탁 칩니다.  

 

 "내가 그렇게까지 잘못 산 건 아닌 건가?"


 "아~~~~~잘못이고 뭐고 아무것도 잘못한 거 없어."


 "정말~? 그럼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걸까?"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게 아니라 당신은 좋아하는 게 너무 많아! 좋아하는 걸 좀 줄여! 그 모든 걸 다 신경 쓰고 다 전부 매일매일 업데이트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면서 살고 있잖아! 나무위키도 좀 그만 보고! 나랑 좀 더 놀아!"


 "알겠어."


 "그리고 아이돌 마스터는 나빠."


 "그건..."


 "농담이니까 넘어가."


 "알겠어."


 "그런데 나 보는 데서 하진 마."


 "... 알겠어."


 "농담이야. 아예 안 하진 말고 적당히 눈치 보면서 해."


 "알겠어!"


 그리고 두 사람은 저녁을 먹었습니다. 정말이지 길고 지겨운 코로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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