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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yers Feb 15. 2022

건축가의 성지순례 3

건축 문화재 단지와 위니테 다비타시옹

여행지에서 가져온 그 어떤 기념품보다 강한 기억을 남기는 것은, 하나의 인상적인 에피소드일지도 모른다. 하나하나 돌아보면 모두가 기억할 만한 장면이었지만,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 여행의 마무리가 다가오던 리옹에서였다. 중간에 몇 번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마르세유를 위해 빼놓았던 하루가 없어져 버렸다. 건축가 남편은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할 수 없지 뭐, 괜찮아”를 되뇌었다. 유레일패스를 꺼내본다. 파리로 돌아가는 TGV를 제외하고도 하루가 남았다. 리옹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라투레트로 떠나는 렌터카 예약시간은 오후 2시. 오전이 비어 있다. 가보고 싶은 곳을 다 가보지는 못하겠지만 가장 보고 싶은 곳 한 군데라도 볼 수 있다면 시간을 가치 있게 보내는 것이 아닐까. 내게 미안해서인지 자꾸만 괜찮다는 남편의 등을 떠밀었다.

 

건축가 남편이 마르세유에서 선택한 단 하나는, 바로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집합주택 위니테 다비타시옹(Unites d’habitation, 1952)이었다. 그땐 아직 라투레트 수도원이나 피르미니는 방문하기 전이라, 그 의미를 잘 몰랐지만 여행을 끝나고 돌아보니, 왜 그렇게 보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다. 게다가 마르세유의 위니테 다비타시옹은 가장 보존이 잘 되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프랑스 축구 선수 지네딘 지단의 주특기 이름을 딴 “마르세유 턴” 작전이 시작되었다. 리옹에서 마르세유까지 기차로 넉넉잡아 왕복 4시간. 새벽에 첫 기차를 타고 리옹을 떠난다면 불가능한 계획은 아닐 것 같았다. 그동안 나는 늦잠을 자고 천천히 체크아웃을 하기로 했다. 돌아오면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동이 트지 않은 이른 새벽부터 기차-택시-버스-택시-기차를 타고 마르세유 턴. 한낮에 리옹으로 돌아온 한 그의 모험담이 이 몇 장의 사진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마침내 모험을 끝낸 남편은 한껏 들뜬 모습이었다. 찬바람을 뚫고 오느라 볼이 빨개졌지만 소년처럼 웃고 있었다. 힘들지만 가보길 잘했다고. 돌아오는 택시를 잡지 못해 급한 대로 아무 버스나 타고 번화가로 나와 다시 택시를 탔는데, 그 기사 같은 분이 서둘러주신 덕분에 커피 한 잔 할 시간이 남았단다. 게다가 그 택시기사가 뤽 베송이 제작한 영화 <택시>의 주인공, 마르세유의 택시운전사와 비슷했다며 즐거워했다. 나도 그동안 쌓인 여독을 한나절 푹 쉬면서 풀었으니 마르세유 턴 작전은 윈윈으로 마무리된 셈이다.


스쳐 지나가는 듯했던 마르세유의 위니테 다비타시옹을 다시 만난 것은, 여행을 마치는 마지막 날 공항으로 가기 전 마지막 일정으로 찾아간 샤요 궁에서였다. 샤요 궁은 센 강을 사이에 두고 에펠탑을 마주 보고 있어 에펠탑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 좋은 곳이다. 1937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지은 건물로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는 광장을 중심으로 양쪽에 날개처럼 펼쳐진 건물이 두 개가 있는데, 한쪽에는 국립해양박물관(Musée national de la Marine)과 인류박물관(Musée de l’Homme)이 있다. 나머지 한쪽은 우리가 방문한 건축 문화재 단지(Cité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다.


사실 마지막 날, 마지막 일정이라 가벼운 마음이었다. 건축 문화재가 전시된 곳이라고 하니 떠나기 전에 시간 보내기 좋겠다는 생각, 그리고 건축여행을 마무리하며 떠나는 순간까지 좋아하는 것을 실컷 보고 가라는 의미도 있었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광장 양쪽 건물이 박물관으로 사용된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에펠탑을 바라보고 왼쪽에 있는 건물이 건축 문화재 단지다.

 

건축 문화재 단지는 프랑스의 건축 문화재들을 모아 둔 곳이다. 3개 층의 상설 전시관과 기획전시관, 건축 관련 도서관에 문화재 복원을 전문으로 하는 대학원도 있다.


당시 기획전시는 프랑스 해변 마을에 대한 것이었다. 18세기 유럽에서 대중화하기 시작한 해수욕은 프랑스의 해변을 휴양지로 바꿔놓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을 건축, 도시계획, 예술작품, 생활용품을 통해 다양하게 볼 수 있도록 전시해 놓은 것이었다. 건축을 주제로 한 박물관답게 건축을 통해 시대를 이해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기획도 신선하고 내용도 방대해서 뜻밖의 수확을 한 느낌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갔다가 푹 빠져서 구경했다.

 

이미지는 모두 건축 문화재 단지 공식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Citedelarchitecture/


프랑스 해변에 하나 둘 생겨나는 별장과 바닷가 리조트의 모형, 도면, 조감도, 사진 등의 이미지가 벽을 채우고 있다. 함께 전시된 해수욕과 관련된 레저용품들도 매력적이었다. 

 

상설전시실에는 주로 중세부터 현재까지 프랑스 건축 유산을 모아 두고 있다. 과거 전시물들은 주로 건축물의 장식들이다. 각종 벽화와 기념비적인 조각품, 건축의 모형, 스테인드글라스, 그림, 오래된 책과 사진에 이르는 방대한 건축 관련 아카이브를 보존하고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 세미나나 포럼을 개최하기도 한다.

 

사실 들어서자마자 맨 처음 들었던 생각은 ‘루브르 아니어도 정말 가진 게 많구나!’였다. 루브르보다는 건축 문화재 단지가 순수한 프랑스의 얼굴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싶었다. 파리와 프랑스 주요 건축물들의 장식물과 조각을 정밀하게 주물로 떠서 실물 크기의 석고 모형을 만들어 놓았는데 10미터가 넘는 것도 있다. 야외에서는 자세히 보지 못했던 장식물들을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다. 문화재 복원 인력을 양성하는 곳이기도 한 만큼 소장품들은 원본처럼 아름답게 만들어 놓았다. 전시장에서 보면서 “이거 설마 진짜는 아니겠지?”라고 자꾸만 묻게 될 정도였다. 비록 모형뿐이라 하더라도,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는 이런 방대한 아카이브가 프랑스 문화의 현재와 미래의 토대가 되는 것이 아닐까.


게다가 파리의 다른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비해 한산하고 여유로워서 그곳의 공기와 햇빛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현대건축 갤러리였다. 산업혁명부터 현대에 이르는 건축 자료들을 수집해 놓았다. 귀스타브 에펠 (Gustave Eiffel)에서 장 누벨(Jean Nouvel)까지 새로운 사고방식과 건축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박물관이 센 강을 사이에 두고 에펠탑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필연인 것 같았다.

 

전시실 창문마다 현대건축의 이정표 중 하나인 에펠탑이 보인다. 층마다 각도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에펠탑의 모습은 이곳의 또 다른 매력이다


19세기부터 현재까지의 건축사를 모아 놓은 현대건축 전시실. 도면, 사진, 영상, 모형 등 다양한 자료를 활용하고 있다


이곳에는 300개 이상의 건축 모형과 약 900개 도면들이 소장되어 있는데 여행 중에 만났던 건물들이 보일 때마다 반가웠다. 역시 알고 보면 더 잘 보이는 모양이다. 섬세하게 잘 만들어진 모형들 너머로 전시실의 끝에는 커다란 방이 하나 놓여있다. 바로 마르세유 턴을 불렀던, 마르세유의 위니테 다비타시옹 한 채를 재현해 놓은 거대한 모형이다.


결국 파리에서의 마지막 순간, 나도 위니테 다비타시옹을 보게 된 것이다. 정작 마르세유에서는 중간층에 위치한 호텔에 묵지 않는 한 실내 관람은 제한적이다. 그러니까 건축가 남편의 ‘마르세유 턴’ 또한 이곳에서 비로소 완결을 맞이하게 된 셈이다.

 


부지 계획부터 층별로 상세하게 구별해 놓은 모형들과 스케치, 사진, 인쇄물 등을 다양하게 전시해 놓았다. 위니테 다비타시옹은 급격하게 팽창하던 도시를 위한 주거의 모형으로 제안된 것이었다. 르코르뷔지에는 당시 열악한 도시 주거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해결책을 건축과 도시계획에서 찾았다. 그중 집합주택- 위니테 다비타시옹은 많은 집을 높이 쌓아 올린 대신 생겨난 여유 공간에 주민이 함께 사용하는 녹지와 다양한 시설을 갖췄다. 그는 위생적이고 쾌적할 뿐만 아니라 생활은 독립적이지만 공동체 문화가 살아있는 모습을 도시민의 이상적인 주거문화로 여겼다. 건축 문화재 단지 홈페이지에서는 이 작품을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합한 건축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마르세유 위니테 다비타시옹의 옥상에서 바라본 지중해와 옥상의 주민과 유치원을 위한 시설들

 

8층에 있는 학교의 복도(위)와 지상층 로비(아래)의 모습. 이 건물에는 레스토랑과 호텔 등의 상업시설도 들어있다


하지만 건축 당시에는 반발이 무척 심했다고 한다. 우선 새로운 공법으로 건축가협회의 비난을 받았다. 위니테 다비타시옹은 공장에서 생산된 조립식 판을 철근 콘크리트 골조에 얹어서 지은 것이다. 주방과 부부 침실, 자녀 방을 공장에서 제작하고 현장에서 조립만 했다고 한다. 이런 방식은 지금도 품질은 좋아지지만, 비용은 많이 드는 건축 방법이라고 하니 당시에는 더 힘들었을 것 같다. 현행법을 어겼다는 항의와 소송이 제기되기도 했다. 완공할 때까지 장관이 7번이나 바뀌었는데도 무사히 준공되었다. 개관할 때는 프랑스 최고 권위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도 받았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어서, 완공 후에도 마르세유 시민들이 ‘미치광이 집’이라고 부르거나 입주를 꺼려서 몇 년 동안 텅 빈 채로 관광객만 찾기도 했다. 다행히 지금은 중산층에게 인기 있는 주거지가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은 참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나의 주관심사는 1952년에 지어진 아파트의 내부 모습이었다. 현관에 들어서니 나무 바닥과 세련된 조명, 아담한 발코니가 반긴다. 이대로 짐을 풀어놓고 한 번 살아보고 싶어 진다. 아담한 주방도 예쁘다. 아기자기한 부엌가구를 보고 “와, 복고풍이다!”하 고 보니, 이걸 따라 하는 게 다름 아닌 복고풍 아닌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간다. 2층은 1층보다 더 넓었는데 생활에 필요한 수납공간도 본격적으로 마련되어 있다. 방마다 수납장이 짜여 있는 것은 물론이고, 복도에도 빈틈없이 수납장이 들어 있었다. 2층에는 부부 침실과 자녀 방 두 개, 욕실이 있다. 위니테 다비타시옹에는 1인 가구부터 자녀가 8명인 대가족까지 구조가 23가지나 있다고 하는데, 두 자녀의 4인 가족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계획인 모양이다.

 

거실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부부 침실과 2층 복도 안쪽의 자녀 방


부부 침실 맞은편, 2층 복도 안쪽에 대칭 구조로 나란히 세로로 길게 놓인 자녀 방은 안에 들어가 보니 밖에서 볼 때보다 아늑하면서도 널찍하게 느껴졌다.  


집을 둘러본 나의 전체적인 느낌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현대건축은 정말 현대적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아파트 정면에서 발코니를 보면 각 세대의 폭이 좁아 보이지만 막상 들어와 보니 깊이도 있고 복층이라 생각보다 크게 느껴진다. 거실과 침실이 분리되어 있어 손님이 오더라도 사생활 보호도 잘되는 복층구조의 장점도 눈에 보였다. 낭비되는 공간 없이 꽉 짜인 구조 때문인지 요즘 유행하는 협소 주택도 생각난다.

 

역사적인 건축물에 산다는 자부심을 느끼며 살고 있다는 현재의 주민들은 어떤 사람들일지 궁금해졌다. 아파트 앞 버스정류장 이름도 ‘르코르뷔지에’란다. 때로는 하나의 건축물이 곧 건축가의 이름이 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건축가의 이름은 잊히더라도 좋은 공간으로 기억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건축가가 기억되길 바라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푹 빠져서 구경하다 보니 어느덧 점심 먹기도 빠듯할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이제 공항으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역시 건축가 남편과의 여행에서 제때 밥 먹으려는 마음은 비우는 게 좋겠다. 가볍게 둘러보려는 마음도 비우는 게 좋겠다. 그래도 마무리까지 건축가의 성지순례로 완성되었으니, 좋은 여행이었던 걸로!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에서 에펠탑이 사라질 때까지 뒤돌아보았다. 건축가 남편은 그 길에서도 새로 짓고 있는 건물에 더 관심이 많았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 건물이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법원이었다며 목소리가 높아진다. 


* 건축 문화재 단지 공식 홈페이지 https://www.citedelarchitecture.fr/

* 마르세유 위니테 다비타시옹 공식 홈페이지 http://www.marseille-citeradieus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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