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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일라 Feb 02. 2020

동백꽃 무렵의 한줄 대사

 대체 우리가 무슨 사이길래 자꾸 내 일에 참견을 하세요. 소문이라면 지긋지긋한 동백이는 자꾸만 다가오는 용식이를 밀어낸다. 그런 용식이는 동백이의 손목을 낚아채며 말한다. “동백씨 명분 좋아하시죠?”




 계속해서 용식이를 거절하기도 미안한 애매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계속 없는 말도 지어내 수근거리는 사람들을 의식하는 동백. 남의 구설 타는게 얼마나 지긋지긋한지 아시냐고 따지는 그녀에겐 감정과 행동을 솔직히 드러낼 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을까. 동백과 과거의 내가 겹쳤다. 무슨 일을 하던 언제 누구를 만나던 늘 명분을 찾아 헤맸던 나는 동백이처럼 착하지도 요리를 잘하지도 않지만 사실 그녀와 비슷한 면이 있다. 자신에게 칭찬을 해주며 자랑이라고 해주는 사람을 처음 만나자 아이처럼 울어버리는 그녀. 사람은 누구나 외로운거고, 특별할 것도 없을 외로움이라지만 아이처럼 우는 그녀의 눈물에 그동안의 외로움에 덜컥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동백을 지칭하는, 타인들이 붙인 이름은 셀 수도 없이 많다. 미혼모, 고아, 술집 여자, 불여시 등등.. 그러나 드라마에서 비추는 그녀는 누구보다 맑고 동화같은 마음을 갖고 있으며 선한 심성으로 꿋꿋히 풍파를 헤쳐나가는 기특한 캐릭터다. 과거도 현재도 늘 최선을 다해 사는 그녀, 그녀의 앞만 보고 사는 모습에서 진정한 동지애를 느껴왔다. 그녀에게 늘 궂은 소리를 해대는 동네 사람들이 등장할때면 나도 모르게 손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을 했고, 그녀가 웃는 장면이 나올때면 나도 덩달아 행복했다.




 동백꽃 필 무렵을 시청하며 특히 이 긴 호흡의 드라마에서 한가지 내가 건질것이 있다면 무엇일까를 내내 고찰했다. 단순한 구도나 드라마의 의도인가, 대사인가, 장면인가... 그러다 저 대사의 '명분'이 떠올라 천천히 적기 시작했다. 이 글엔 이 드라마를 향한 나의 진한 애정이 숨길 수 없이 담겨져 있다. 나는 어떠한 명분을 가지고 살고 있을까?




 문득 글쓰기가 떠올랐다. 매일 쓰는 글은 내가 발전하는 모습을 여과없이 비추는 좋은 도구다. 몇년 전 적었던 글 하나에도 어떤 마음이 담겨있는지 읽는 순간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심지어 누군가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는지, 언제 어디서 썼는지 까지도 상세하게 기억난다. 나의 3초 기억력은 이럴때만 유용하게 발동하는가. 글이란, 이런 과거의 나를 기록한 한 장치를 다시 마주하고 나니 현재 나의 상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현재의 나는 분명 과거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다. 나는 어떠한 사건들을 마주하고 변해왔는가. 시간이 지날수록 내 자신에 대해 자주 질문하고 배우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깊이 공감했던 용식이의 한줄 대사. 명분이란 늘 내가 원하는 곳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예외없이 의도하지 않은 일들과 만남의 연속으로 우리는 산다. 선물받은 책과 엽서를 넣어 들쳐멘 가방과 향수냄새가 진하게 배어있는 스웨터를 입고 파리에 도착한 후로 묵은 내면화가 조금은 기지개를 펼 수 있었지만 지속되는 적막에 계속해서 지난 날들을 돌아보는 나. 꿈꾸고 설레하는 미래의 반만큼, 내게 허용된 만큼만은 하루의 끝에 걸어놓아야 붙잡고 살 수 있으니까. 멈추지 않고 글을 써내려가다 보면 하루가 시작하고 그 사이 또 하루가 끝난다.




 마크 고든과 해리 레벨의 곡 ‘There’s a lull in my life’ 의 가사엔 이런 글이 있다. Oh, there's a lull In my life. The moment that you go away there is no night, there is no day. The clock stops ticking and the world stops turning. Everything stops but the flame in my heart that keeps burning, burning. 내 인생엔 적막 뿐이에요. 당신이 떠난 순간 낮이고 밤이고 다 없어져 버린걸요. 시계는 돌아가지 않고 세상은 멈추죠. 모든 것이 멈추지만 내 마음 속의 불꽃은 계속 타오르고 있어요. 불처럼 타오르는 용식이 같은 마음이, 동백씨가 없다면 내 인생엔 적막 뿐이라고 외치는 이 곡과 100% 일치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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