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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연결되는 사람들

by 레일라



밀레니얼 세대



요즘 세대는 내 주변에 일어나는 일, 내가 연대할 수 있는 작은 관심사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 작가, 정치인 등을 소소히 지지하며 후원할 수 있는 이벤트를 눈여겨 보기도 하고, 취미반으로 열리는 원 데이 클래스가 인기로 떠오르기도 한다. 흔히 유명 가수가 한 번쯤은 꼭 밟아봐야 한다는 해외 콘서트 원정 같은 큰일을 도모하기보다는 옆 동네 작은 살롱에서 열리는 미니 콘서트, 독립 책방에서 열리는 작가와의 대화 또는 소규모 모임을 더욱 선호하는 추세다.



미디어와 문화는 점점 더 세분화되고 쪼개지는 가운데, 나를 만족시킬 하나의 취향을 발견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마음껏 소비할 대상을 찾는 일은 평생토록 행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내 일상과 맞닿아 있는, 그래서 더욱 공감할 수 있는 바운더리를 소유한 몇 사람들과의 연대가 더욱 중요하게 된 시대, 바로 밀레니얼 시대다. 이러한 키워드를 찾게 된 이유는 바로 내게도 필요했던 '소통'이었다.



2016년 5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억압되었던 여성들의 말과 글들은 여기저기 터져 나왔다. 많은 여성들이 지난 시간 동안 잃어버렸던 내 몸, 내 권리에 대한 연대를 크고 작은 독서 모임을 통해 이어가기 시작했다. 지난 통계는 <82년생 김지영> 이후 페미니즘, 여성학 등에 관련된 출판 서적이 몇 배로 뛰었을 만큼 '여성의 이야기'에 열풍인 사회와 배경을 비춘다.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는 명제로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책으로, 정치로, 또는 다른 무언가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나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은 양상에 속한다. 내 경험상 목에 걸린 상처를 뱉어내는 글쓰기는 처음이 어렵지, 다음은 비교적 수월했다는 홍승은 작가의 글처럼, 한 계기로 인해 나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조금씩 그리고 매일같이 풀어냈고, 기록했고, 사람들과 공유하기 시작했다. '나'의 이야기를 쓰는 것, 그리고 그를 공개적인 장소에 펼쳐두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한 사람은 단 하나의 단어로 압축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다양하게 교차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나를 표출하는 글 또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이러한 고민이 점차 쌓여나가고 있던 중, 한두 달 전 평소 존경해오던 작가님을 카페에서 만났다.




위로받은 날, 그녀에게



평소 SNS로 공유하는 사유들 또한 몇 년째 눈여겨보며 조용히 팔로워를 해왔었다. 만나 뵙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메시지를 겨우 용기를 쥐어 짜내 보냈는데, 흔쾌히 그러자는 답장을 읽은 후 순간 패닉 상태에 빠졌다. (비록 내가 먼저 주선했지만) 이런 급 전개의 만남이라니, 게다가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작가님과의 점심이라니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늘 책 속의 작가님과 셀 수도 없이 대화를 나누던 나였지만 상상이 급 현실이 되자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작가님을 실제로 보니 어찌나 떨리던지. 어떠한 기대나 이상을 가지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글에 서려있는 지적인 날카로움과 거침없던 용맹한 모습을 이미 읽고, 좋아하는 팬으로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질문하고 싶었던 것들은 많았지만 겨우 참고 앞에 놓여진 밥을 입에 구겨 넣으며 더듬더듬 진심을 전했다. 작가님과 글을 쓰며 사는 것에 대한 고충이며, 여성의 삶, 후 나올 신간 에세이에 관한 이야기 등 넘치게 따듯하고 유익한 시간을 보낸 후 집에 돌아와서 한참동안 그 대화의 깊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작가님과의 대화 중 유난히 내게 힘이 되었던 말이 있다. 약 2년 전부터 나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글을 써왔다고 고백한 후, 아직도 자다가 참을 수 없는 이불킥을 종종 경험한다고 털어놓았다. 내가 제 글에 대해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닌데요... 했더니 작가님이 하는 말, 자신도 같은 일을 경험한다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많은 책을 펴내고 글을 써온 사람도, 내가 그리 존경해 마다하는 작가님도 나와 같은 것을 느끼는구나 싶어서.



나 또한 글이 나의 개인의 경험과 판단을 섣부르게 일반화하는 글로 읽히지 않기를,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글이 되지 않기를 수없이 기도하며 공유 버튼을 클릭한다. 한없이 부족한 전달력과 정보력을 가지고 있기에 염원하는 일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늘 형체없는 두려움과 싸운다. 작가님도 물론 처음에는 두렵고, 떨리고, 되돌아봤을 때 아쉽고 부족한 글이 될 수는 있지만 그 또한 지나가면 경험으로 쌓이며 앞으로의 글쓰기에 용기로 축적된다고 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한 초반엔 글에 달리는 댓글을 종종 찾아봤으나 이젠 그러지 않고 지금은 어떤 악의가 담긴 의견이든 그러려니 한다고. 늘 나 자신, 그리고 글과 싸우는 직업 사명이란 생각에 어디에 불평하지도 못해왔던 일이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동경하던 대상으로부터 따듯한 위로를 받은 듯 했다.



이처럼 공감을 야기하고 나눌 수 있는 존재를 만난다는 것은 큰 축복이라 생각한다 글로, 말로 한참 나눴던 '우리'의 이야기가 전해준 온기는 아직도 가슴 한편에 따듯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2019년, 내가 계속해서 글을 쓰고 사유하기를 멈추지 않게 해준 고마운 인연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끊임없는 자아성찰과 책과의 단조로운 소통으로 그동안의 외로움을 버텨왔다면, 타인과 직접적으로 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드는 때였다. 최선을 다해 글을 써왔기에 두려울 것은 없었다. 어떠한 비판도 감수할 자신이 있기도 했다. 게다가 발가벗은 나의 솔직한 모습을 온통 쏟아부은 에세이 출판기획을 한번 엎고 나니, 한결 더 담담하고 객관적인 태도로 글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할까.




책과 연결되는 사람들



글을 쓰는, 즉 집필을 하는 일엔 공동체의 필요성을 빼놓을 수 없다. 기꺼이 타인의 글을 읽어주고 지지를 보내며 서로 절충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용감하고 따듯한 존재들. 어느 순간 부터 그런 존재가 내게 절실해졌다. 나를 나로 살게 하는 글쓰기를 지향하며 쓴 나의 글들이 외로이 온라인을 떠돌고 있는 동안 내 글을 땅에 뿌리내릴 힘을 실어줄 사건과 사람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아닌 것이 글이 될 수 없고, 남의 글이 내 것이 될 수 없듯이, 나의 자아를 한참 글에 푹 담갔던 시간들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렇게 떠돌던 어느 날, 한 SNS의 계정에서 책 모임을 한다는 달리 봄 책방의 공지를 통해, 지난겨울 <페페 연구소>를 만났다.



페페 연구소, 즉 여성주의 교육 연구소 (페미니스트 페다고지) 모임은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교육을 꿈꾸는 곳이다. 소규모 책 모임으로 모인 이곳에는 글쓰기, 그리고 책 읽기 두 가지의 공통점 외에도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그리고 교육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그들과 세상의 이슈들을 바라보는 눈을 키워가며 셀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아낌없이 연대하는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자유로운 '나'의 상태가 될 수 있는 공간에서의 기쁨을 만끽하고, 함께 책들을 한 장 한 장 밤을 새가며 읽고 글을 써 내려가는 그 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매주 한 번씩 만나는 그 시간들을 손꼽아 기다렸다. 어쩌면, 그들을 만나게 된 것은 긴장감 넘치던 아홉수 끝자락에 마지막으로 주어진 행운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각자의 위치에서 공부하고 서로를 지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내겐 큰 공부가 되었기에 모임에서 나는 내가 원하던 해답과 사람들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후, 이러한 행운을 안은 나는 다시 파리로 돌아와 꾸준하게 책을 읽고 사유하며, 꿈을 꾸고 글을 쓰기를 멈추지 않고 살고 있다. 다양한 주제, 문체 그리고 방향으로 글을 쓰며 좌절하고 동시에 희망을 얻는다. 이제는 대단한 타이틀일량 미련 없이 내려놓고, 남을 위해 나를 정의 내리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노래하는 사람, 쓰는 사람 이 두 가지면 기쁘게 영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박하지만 큰 꿈을 꾼다.



글쓰기는 나 자신과의 싸움인 동시에 읽어줄 독자와의 소통을 필요로 한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나의 글을 좋아해 주는 독자들이 늘었고, 꾸준히 블로그에 들러 읽어주는 이웃들 층도 두터워졌다. 나의 글을 읽고 같은 꿈을 가지게 되었다고 메시지를 보내준 한 고마운 고등학생, 손 편지를 보내준 팬도 있었다. 이전의 나는 나를 정의하기 위해, 그리고 살기 위해 글을 썼다. 하지만 이제는 나와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 쓴다. 내가 곧 이웃이고, 이웃이 곧 세상이란 믿음으로.




사라 아메드는 정의를 위해 싸운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정의로우리라는 보장은 없다며 망설여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촘촘하게 차별로 연결된 고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조금 더 촘촘하게 사유하고 망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쓰는 사람으로 지녀야 할 태도를 생각한다.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대변할 수 없는 내 위치의 한계 알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하려는 노력을 버리지 않기.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고통을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기. 쓸 수 없는 말을 쓰기.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홍승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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