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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일라 Sep 27. 2019

작곡가들은 어디서 영감을 얻는가



   평소 잘 보지 않는 텔레비전을 우연히 틀어 바래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소음에 취약한 편이라 일상적인 소음 외에 주변의 소음들은 민감하게 차단하는 편인 나는 평소 파리의 길거리에서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에도 민감하다. 때문에 환기할 때 외에는 창문을 잘 열지 않고 라디오 (radiofrance)를 틀어놓는다. 라디오는 소리를 녹화하는 방식으로 '대화' 또는 '해설', '음악'에 초점을 맞췄다면 텔레비전은 (특히 한국 예능) 셀 수 없는 방청객들의 무분별한 반응, 박수, 지나친 효과음 등으로 수시로 바뀌는 현란한 화면과 매치되도록 여러 주파수를 동시에 한꺼번에 내보내기 때문에 민감한 나는 한 시간 이상 듣고 있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상하게 오늘은 적막을 견디기 힘들어 오랜만에 텔레비전을 키고 하루를 시작했다.



   보통은 잠자리에 들기 한두 시간 전에는 미디어를 접하거나 새로운 정보를 읽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머리를 비우고 온전히 잠에 들어도 푹 자는 날이 많지 않은 예민한 잠자리를 가지고 있는 나로선 잠들 기용 화이트 노이즈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오늘은 일상적이지 않은 백색소음이 필요한 날이었다.  철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한국에서 사는 프랑스인 친구와 이 '잠'에 대해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는 20대의 대부분을 잠과 씨름하며 보냈다고 한다. 아무리 육체적으로 에너지를 소모하고 고단한 몸을 침대에 뉘어도 떠오르는 온갖 일상의 잔해와 과거의 잔상들 또는 공부하고 있는 주제와 아이디어들로 인해 잠을 푹 자 본 날이 손에 꼽혔다고, 너의 잠 못 자는 고통을 이해한다고 했다. 글쎄, 듣고 보니 나는 그 정도 까진 아닌데. 높은 질의 수면을 갈망하는 사람으로서 ‘잠’은 늘 화두에 오르는 주제긴 하지만.



    보통 곡 작업을 하다 보면 옆에서 정말 간절히 아무도 날 건드리지 않았으면 하는 때가 있는데,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온갖 집중력과 에너지를 불태우고 나면 소모되는 그 정신력이란 순간 놓지 않으면 산산이 깨어질 것 같은 약한 것이어서 쓰러져 잘만 잔다. 가끔,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 의미를 곱씹으며 분석하고 싶어 지는 때가 있는데, 겨우 잠이 들어도 새벽같이 눈이 떠지는 일 년에 몇 안 되는 주가 있다. 어제가 그 시작을 끊은 힘든 날이었다. 




    작곡은 크게 멜로디 반주와 반주 작업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아 가장 중요한 요소인 멜로디를 만드는 작업에 가장 공을 들인다. 내가 여태까지 들었던 많은 작곡 수업의 커리큘럼의 대부분도 어떻게 하면 좋은 멜로디를 만드느냐에 접목한 부분이 가장 많았을 정도. 과학적이고 계산적인 영역으로 곡 작업을 배우는 초반 단계와는 달리 어느 정도 곡을 작업하는 훈련이 된 이후부터는 어느 정도의 감성적인 영감도 작업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 정복해야 할 것은 어레인지먼트인데, 멜로디가 아무리 좋아도 연주하는 악기의 특성을 공부하지 않으면 그냥 별거 없는 미디 작업에 불과한 수준의 결과물이 나오게 된다. 주는 악보에 적힌 그대로, 정확하고 명료한 노트를 쳐야 하는 연주자와는 달리 작곡가는 이 모든 화성과 연주자들 간의 호흡을 미리 어레인지하고 악보를 만드는 '작업자' 단계의 직업인 것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버스를 타고 무심히 지나가는 창밖 풍경을 볼 때 영감을 많이 받는다.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의 옷차림, 표정, 건물들의 색깔.. 이 모든 게 파노라마처럼 주욱 지나가는 걸 보고 있자면 수많은 생각들이 떠오르고, 그중 악상으로 많이 변환되어 마치 캐치마인드를 플레이하는 것처럼 순간 걸러지는 형태가 생긴다. 곡의 형태나 분위기, 가끔은 화성이나 코드가 생각나기도 하는데 그 순간 바로 확인하지 않으면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바로 어플이나 튜너로 확인하고 적어놓곤 한다.



    길을 천천히 걸을 때 갑자기 떠오르는 악상들도 있는데, 가장 떠오르는 그럴듯한 이유로는 집에 앉아서 가만히 눈과 귀를 닫고 있을 때보다 인풋이 많은 밖에 있을 때 여러 소리와 감각, 냄새들이 교차되면서 뇌신경을 자극해 악상이 더 많이 떠오르는 것이라 짐작하고 있다. 물론 악상이나 가사 외에도 영상 연출, 특정 분장이나 의상, 줄거리 등도 자주 떠오르는데 파리로 이사 온 후 모아놓은 시시콜콜한 시나리오만 꽤 되는 편. 테마별로 노트에 정리해 놓았는데 지금 읽어보면 웃음만 나오는 수준이지만.



    가끔은 인풋은 너무 많은데 아웃풋이 없어 곡 작업이 원하는 만큼 활발하지 않나 생각이 들기도 한다. 대부분의 일들은 끝이 있고, 그 끝에는 마감이라는 기한이 정해져 있어야 빛을 보는 경우가 많다. 음악뿐이 아니라 글쓰기도 마찬가지.. 언젠가는 그 어떠한 심리적인 압박 없이, 자유롭게 글과 음악을 쓰고 어떠한 제약도 없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크리에이터가 될 수 있으리라 희망을 가져도 되는 걸까. 자유로운 영혼들이 쉬어갈 수 있는, 단순하지만 영혼을 울리는 그런 노래와 글을 쓰는 삶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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