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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하게도 길었던 그 밤

엄마한테 다시 와 줘

by 찬란


“안녕하세요, 임차인입니다. 저희가 분양받은 아파트에 2월 입주 예정이에요. 맞춰서 전세 계약을 완료하려고 합니다. 보증금 반환 확인 차 연락드려요.”

“요즘 전세가 잘 안나가네요.”

“……? 네. 저희 분양 잔금을 치러야 해서요. 꼭 잘 좀 부탁드립니다.”

“네.”

카톡을 보고 또 봤다. 전세집 집주인은 나이든 할머님이었다. 아마 카톡을 타이핑 하는 게 익숙하시지 않아서 짧게 쓰시는 거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설마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일은 없겠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인데.

만약 전세금 반환에 차질이 생긴다면?

그럼…분양 받은 아파트 잔금 처리가…

아이, 생각하지 말자.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출근해야 했다. 설마하니 그런 일이 있지는 않겠지. 혹시 모르니까 할머님이 이 집 부동산에 내 놓으셨는지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집 여러 번 보여줘야 할 텐데. 우리 둘이 맞벌이 중이니 어떻게 하는게 좋으려나.

일단 일하러 가자.

다시 한 번 고개를 흔들었다.




“용과 차장님, 그 천만원 빌려드린 거 말인데요…”

“어어 라임씨. 그거 왜?”

“아니…그 때 말씀이 두 달 후에 돌려주시겠다고…”

“어어. 내가 돌려줘야지. 근데 이제 비트코인이 원금 회복할랑 말랑 하고 있어서.”

“아, 네…”

“걱정 마. 내가 그 돈 떼먹을 사람이야? 나 원금 회복만 하게 도와주라. 좀만 기다려줘.”

“아…”

어렵게 어렵게 빌려준 돈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용과 차장에게 천만원을 빌려준 지 세 달이 지났다. 용과 차장은 나를 슬슬 피했다. 인사는 잘 하고 소소한 농담도 했지만 담배타임이나 커피 한 잔 하자는 말은 이제 없었다. 작정하고 말을 어렵게 꺼냈지만 용과 차장은 조금만 기다리라며 또 나를 회피했다.

아…스트레스 받아.

아내도 지금 임신했는데. 돈만 내가 처음에 모질게 못 빌려준다고 했어도 이런 일에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는데. 없는 돈인셈 치기엔 금액이 컸다. 나 스스로가 한심했다.

일단은 한 번 말해뒀으니까.

설마 같은 회사 다니며 떼먹기야 하겠어.

다시 업무에 몰두했다. 예전부터 나는 심란하면 도피성으로 다른 무언가에 집중하곤 했다.

다 잘 될거야. 다 잘 될거야.

다시 한 번 고개를 절레 절레 저었다.


“여보 몸 컨디션은 좀 어때? 괜찮아?”

“응, 빠르면 5주부터 입덧이 시작된다고 하더니…영 몸 컨디션이 좋지 않아. 힘도 없고 식욕도 없네.”

“어휴 걱정이네.”

“여보 그리고…나, 오늘 부동산한테 물어봤어. 우리 집 집주인이 전세 내 놓으셨냐고.”

“어 당신도? 나도 집주인한테 카톡 보냈었는데.”

“응. 근데 우리 들어온 전세금보다 1억이나 비싸게 내놓으셨더라고.”

“그래??”

“집이…안 나간다고 하면서…전세금 못 돌려주면 어떻게 해…?“

아내의 낯빛이 하얗게 변했다.

”서,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

”우리 입주 날짜가 세 달 남았어…괜찮겠지?“

”여보, 당신은 스트레스 받지 마. 몸도 홀몸 아닌 사람이 그렇게…“

”스트레스 받는 걸 어떻게 해…”

아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아기 태어나면 들어갈 돈도 많고. 아기는 사치재라고들 한다며…“

”아니야. 여보 아무 생각 마. 스트레스 받으면 아기한테 안 좋아.“

”만약...전세금 못 돌려받으면 어떡하지? 걱정되어 죽겠어...“

아내의 손을 꽉 잡았다.

아내의 손이 차가웠다.

아기 가진 몸으로 얼마나 맘이 무거웠기에.

얼마나 긴장하고 힘들었기에.

”다 우리가 해결할 수 있어. 걱정 마. 나 오늘 보험계리사 합격증 링크드인에 올렸다? 보여줄까?“

”힝…“

차가운 아내의 손을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아내는 임신했다고 특혜 받는 건 싫다며 부득불 야근까지 감행하고 있었다. 아직 회사에도 임신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일단 아내 마음을 진정시키자.

”모레 아기 심장 소리 들으러 산부인과 가는 거지? 토요일이니까 나랑 같이 가자.“

”응, 그거 기대돼. 드라마에서 봤는데 그걸 내가 하게 될 줄은..“

아기 심장 소리 이야기가 나오자 아내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7주면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했다.

”나 궁금해. 7주 된 아기 심장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유튜브에서 봤는데, 공사장 소리 같다고 하던데?“

”공사 맞지. 엄마 뱃속에서 집 짓고 대공사 하는 거지.“

”하하하 맞네…“

한참을 주무르니 아내 손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만하라며 아내가 웃으며 손을 뺐다.

그래,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다 잘 될거야. 다.


”그…산모님. 음…아기가 심장이 뛰지 않네요.“

”………네?“

”아기가…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계류유산입니다. 이런 경우엔…아기가 더 크지 못하고…소파 수술을 하셔야 합니다.“

“………네?”

“수술 할 수 있는 병원으로 전원하시게 소견서 써 드릴게요…”

”그게…무슨…“

아내와 처음으로 간 산부인과였다. 의사가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초음파를 보더니 진료실에 다시 앉으라 했다. 그러더니, 아기가 심장이 뛰지 않는다고 했다.

”이 수술은 빨리 하셔야 해요. 제일병원에 제가 연락해드릴 테니, 수술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네?“

아내가 휘청였다. 나도 모르게 황급히 아내의 어깨를 붙들었다.

”……이유가…“

”네? 산모님…“

”왜…왜 그렇게 된건가요…?”

“음…그건…이유는 아무도 몰라요. 이런 경우 아기가 애시초 유전자적 결함을 가졌을 수도 있고요…”

의사가 망설이며 말을 골랐다.

“환경적으로 스트레스에 과도하게 노출되면 그럴 수도 있고요.”

“……”

“하지만…첫 임신에는 꽤 흔한 일이에요. 어쨌든 빨리 수술하시고 몸을 회복하시는 게 중요합니다.”

“……”

“가능하면 빠른 시간 안에 수술 받으시고요. 제가 그 병원에 얘기해 둘게요.“


아기의 심장이 뛰지 않는다.

아기가 유산되었다.

아내는 수술해야 한다.


비틀거리며 진료실을 나왔다. 멍하니 앉아 있는 아내를 두고 급하게 수납처리를 했다. 카카오 택시를 불렀다. 아내를 태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침대로 들어가서 나오질 않았다.

제일병원에 전화를 했다. 가장 빠른 수술 가능 날짜가 모레라고 했다. 그렇게 해 달라고 했다.

양가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전화기 너머 깊은 탄식이 들렸다. 침통해하시는 부모님들께 수술 날짜를 알려드린 후 전화를 끊었다. 배달의 민족을 켜 아내가 좋아하는 육개장을 주문했다.

아내는 침대 안에서 나오질 않았다.

저녁밥도 먹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집 안을 정리하고 모든 불을 다 껐다. 차가워진 육개장 두 그릇을 냉장고에 넣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도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이불 속에서 아내가 새우처럼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아내를 뒤에서 꼭 껴안았다.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나라도 단단하게 버텨야 했다.

”……여보. 괜찮아?“

”……“

”……여보…“

”……안해.“

”…뭐라고?“

”미안해. 아가야.“

“여보...“

“미안해 아가야. 널 사치재라고 불러서…“

툭.

댐 벽에 금이 찍 갔다.

”미안해. 아가야. 미안해…엄마가 정말로 미안해…“

”여보………“

”그러니까, 그러니까……“

”……“

”다시 와줘...“

“.......”

“엄마한테…다시 와줘...제발…“

그 순간,

우리는 함께 무너졌다.

”으흐흑……“

”여보…흐흐흐흑…“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한참을 흐느꼈다.

흐느끼고 또 흐느껴도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그날 밤은 너무도 길었다.

너무도 길어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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