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증명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렵냐
까톡!
<계좌번호 알려주세요, 날짜 맞춰 입금할게요.>
집주인이다. 전세금을 돌려 받게 되었다. 그 전세금으로 우리 입주할 집 잔금을 치르면 된다. 아아, ‘입금’이란 단어는 뭐가 묻어서 이렇게도 달콤한 걸까.
당연한 일이지만,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걱정 하나를 덜었네.“
씨익 웃었다.
”전세금을 받고 나면 전세자금대출금을 은행에 갚고, 남은 돈으로 잔금 치고…“
불과 오 년 전만 해도, 나는 몇 백만원이란 돈에도 벌벌 떠는 대학생이었다. 이제는, 은행에 가서 송금 한도를 일억원으로 조정하는 직장인이 되었다.
내가 자라난 걸까,
돈 가치가 없어진 걸까.
아무려면 어때. 휘파람을 불며 아내에게 집주인의 카톡을 캡쳐해 보냈다.
<여보, 집주인이 이렇게 보냄 ㅋㅋㅋㅋ>
이제 남은 숙제 하나.
용과 차장에게 빌려준 돈 천만원을 돌려받기.
할 수 있어 김라임.
”차장님, 저희 다다음주에 이사여서요.“
”어, 라임씨. 얘기 들었어. 집 산거 이제 들어가는거야?“
”네, 분양 받았어요. 그냥 작은 거, 외곽에…“
”잘 나가네?“
뭐지? 말끝에 가시가 느껴진다.
하지만 나도 예전의 내가 아니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칠 수 있다.
“그래서… 저 빌려드린 돈 받았으면 합니다, 차장님.”
“휴…지금 내가 돈이 다 묶여버렸어. 아니…잠깐만…”
용과 차장이 갑자기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의 표정은 이제 미안함이 아니라 귀찮음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여기 잔고 보여줄게, 봐봐…”
아니 저게 무슨 논리야. 잔고가 0원이면 빚이 없어지나?
나도 내 통장 잔고 보여주고 ‘차장님, 욕 한 번만 하겠습니다.’ 하고 싶다.
“아뇨, 차장님. 안 보여주셔도 됩니다. 약속하신 건 두 달이었는데, 일 년이 다 되어갑니다…“
”아니, 잠깐만…“
기가 막힌 타이밍에 용과 차장에게 전화가 왔다.
”어? 어…아 팀장님이? 어 나 밑에 있어. 바로 갈게.“
용과 차장이 허둥지둥 올라가봐야 한다며 담배를 비벼 껐다. 다음에 얘기하자며 올라가는 용과 차장의 뒤통수를 향해 말했다.
”차장님. 내용증명 보내겠습니다.“
용과 차장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 움찔한 것 같았다. 그는 못 들은 척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휴…“
한숨을 쉬며 나도 터덜터덜 걸어갔다. 용과 차장과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기 싫으니 천천히 걸어야 했다.
”라임씨, 이사 준비는 잘 되어 가요?“
”아, 네. 저보다 와이프가 고생이죠. 이래 저래 챙길 게 너무 많아서…“
”휴, 맞아요. 나는 세상에서 이사날이 제일 싫더라. 그리고 이사 다음날…“
파인애플 대리에 의하면 회사를 통해 이사업체를 계약하면 할인을 해 준다고 했다. 일종의 복지인 셈이었다. 어쩔 수 없이 회사에 이사날을 오픈했다. 팀장은 내가 분양받은 집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팀장은 농담을 하면서도 은근히 신상조사를 벌였다.
”라임씨 벌써 집도 마련하고 말이야. 얼마나 좋겠어?? 옛날같으면 우리 회사에서 지원군 보내서 상자도 나르게 하고 그랬을텐데 껄껄껄.”
“아닙니다 팀장님. 이사업체가 다 해주는 걸요.”
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심으로요.
“거기가 은평구라고 했나? 3년전에 분양받았다고?”
“예.”
“분양가가 얼마였어?”
“4억 좀 넘습니다, 팀장님.”
“그으래? 지금은 시세가 어떻게 돼?”
뭐 이런 식이었다. 상급자는 하급자의 자산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묻고는 했다. 되려 “팀장님 댁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반문하면 어영부영 말을 흐릴 거면서. ”팀장님은 잠실에 살고 계시니 더 기분 좋으신 거 잘 압니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꾹 참았다. 팀장이 용과 차장과 친한 걸 알고 나서부터는 괜히 더 부아가 치밀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팀장은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요즘은 다들 뭘 많이 사대? 옆 팀에 용과 차장도 이번에 차 새로 뽑았잖아.”
모니터를 보며 키보드를 두드리던 내 손가락이 멈췄다.얼어버렸다.
“어머, 용과 차장님 차 새로 뽑으셨어요?”
”어, 뭐 외제차 고민하다가 결국 그랜저로 했다던데?“
팀장과 파인애플 대리의 대화를 들으며 단전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그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지나 눈가에 이르자, 얼굴이 활 활 타는 것 같았다.
워드 프로그램에서 CTL+N을 눌렀다. 새 문서가 열렸다.
용과차장을 향해 내용 증명을 써야 했다. 나에게는 저번 전세금 반환 때 내용 증명을 보내 본 경험이 있었다. 그 때 파일을 불러와 템플릿을 재활용해야겠다. 다행이다.
다행인지 뭔지.
”라임씨, 나랑 장난해?“
”용과 차장님, 제가 내용 증명 보낸다고 했잖습니까?“
”언제?? 내가 이런 데 쓰라고 우리 집 주소 가르쳐 준 줄 알아?“
”전 빌려드린 돈 돌려받기만 하면 됩니다.“
”지금 회사 앞 투썸플레이스로 나와. 하 라임씨 그렇게 안 봤는데…“
이삿날이 코 앞인 주말이었지만 나가야 했다. 아내에게 급하게 출근해야 할 일이 생겼다고 거짓말을 했다. 죄책감에 가슴이 쓰라렸다.
이것도 회사의 나쁜놈이랑 싸우러 가는 것이니 일종의 회사일인 셈이지.
하…이렇게 합리화 하는 내가 싫다.
이제 어떻게든, 이 일을 쫑을 봐야 했다.
아내에게 돈을 다 받아낸 후 모든 것을 고백하자. 지금은 무조건 받아내는 것에만 집중하자.
오늘 담판을 짓자.
반드시 받아내리라.
이를 악물고 자켓에 팔을 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