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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에게 떼먹힌 돈 받아내는 법

쫄지 마 절대.

by 찬란


카페 자동문이 열렸다. 들어서니 커피 향이 확 풍겼다. 안을 둘러보니 한쪽 구석에 용과 차장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문을 등지고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차장님.“

”라임씨, 앉아.“

용과 차장의 목소리는 퉁명했다. 태도도 고압적이었다. 그의 손목에는 반짝거리는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예전 한창 비트코인 잘 나갈 때 리세일로 질렀다고 했었다.

”네 차장님.“

나는 이 자리에서 얻어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반드시 받아낼 거야.

그리고 나서,

오늘 아내에게 오랫동안 숨겨온 이야기를 고백할거야.

해피엔딩을 만들 거야.

오늘만은 끝장을 볼거야.


”라임씨, 내가 말이야…라임씨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어. 내용증명? 이게 뭐야? 그건 좀 심했잖아?“

용과 차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일…이…삼… 삼 초.

내가 아무 말 없이 빤히 쳐다보자 용과 차장은 약간 얼굴을 붉힌 채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나는 대답 대신, 천천히 스마트폰을 꺼내 책상 위에 뒤집어 올려 놓았다. 용과 차장의 말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라임씨는 몰랐을거야. 내가 라임씨 모르게 뒤에서 회사 일 엄청 도와줬다는 걸. 그거 알아? 라임씨 팀장이랑 나랑 꽤 친한 거. 내가 전에 팀장이 라임씨에 대해서 컴플레인 할 때도 말이야, 얼마나 실드를…“

용과 차장의 시선이 내 스마트폰에 머물렀다.

”…뭐야. 지금 녹음하는 거야?“

용과 차장의 한쪽 눈썹이 튀어 올랐다.

”네.“

설명은 생략한다. 당신한테 녹음 이유를 설명할 의무 없으니까.

용과 차장은 ‘허!’ 라며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동시에 다리를 더 가열차게 떨기 시작했다.

”라임씨, 내가 안 갚겠다고 한 적이 있어? 애시초 내가 뭐 라임씨를 강요해서 돈을 뺏은 것도 아니고, 라임씨가 먼저 제안했잖아? 힘들면 도와주겠다고…“

참,

당신이란 사람은 이렇게도 예상 안에서 움직이는구나.

나는 가방에서 종이 한 뭉치를 천천히 꺼냈다.

겉표지에는 용과 차장 이름 석자가 적혀 있었다.

”최용과“

표지의 자신의 이름을 확인한 용과 차장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A4 세 장에는 날짜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각 날짜 옆엔 용과. 차장이 나에게 했던 말이 정리되어 있었다.

. 2020.12.14 - ’두 달만 기다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갚을게.‘

. 2020.12.15 - ’두 달 내가 얘기했었지?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2020.12.20 - ’회사에서 상여금 들어오면 바로 넣어줄게.‘

.2020.12.28 - ’상여금을 급하게 아내 병원비로 써 버렸네. 비트코인도 이제 원금 회복할랑 말랑…‘

용과 차장은 내가 차분하게 읽어내려가자 얼굴이 확 굳었다.

”차장님, 저는 차장님에게 돈을 빌려드리겠다고 먼저 제안한 적이 없습니다. 저에게 먼저 요청하셨고, 그 날 저는 메신저에 차장님이랑 그 내용으로 얘기도 나눈 적 있어요.“

”이…이걸 다 적어놨어?“

”네. 오늘도 적을 거에요.“

용과 차장이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내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 몰랐겠지. 회사 안에서는 우리는 조직 서열을 따르는 상하관계였다. 그러나, 회사 밖에서는, 그냥 우리는 똑같은 사람. 남이었다. 그 불변의 진리를 그는 이제야 알았다.

카페 커피머신에서 ‘치익-’뜨거운 스팀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끝나며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차장님.“

”으…응.“

”차 새로 뽑으셨다면서요?“


”들었습니다. 용과 차장님 차 새로 뽑으셨다고.“

용과 차장은 입을 떡 벌렸다. 의자에 걸쳐 있던 몸을 순간 곧추세웠다.

”아, 아니, 그건… 중고예요. 명품도 아니고… 그랜저야. 그 친척 중에, 처분을 급히 해야 하는…“

급히 양도받은 중고차를 누가 새로 뽑았다고 말해?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오늘 천만 원 변제 받고싶습니다. 지금 입금해 주세요.“

”아니, 라임씨…그…내가 정말 그러고 싶은데…“

”입금 안하실 건가요?“

”잠깐, 아니 내 얘기 좀… 그럼 내가 삼백만원밖에 없어서 그걸 먼저 갚고 나머지는 매 달 삽십만원씩 2년동안 갚을게…정말이야 정말…“

”삼십만원씩 2년이요?“

”그래 정말이라니까. 내가 지금 당장 각서라도 써 줄게.“

용과 차장은 붉어진 얼굴로 떠듬거렸다. 한숨이 나왔지만 나는 준비해온 종이와 펜을 꺼냈다.

”여기 그럼 변제 계획 적어주세요. 약속을 글로 남겨주세요.“

용과 차장이 멈칫했지만 조심스럽게 펜을 들었다. 손끝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금일부터 2년간 매달 30만원이라고 쓰시면 돼요. 지금 말씀하신 그 계획대로.“

종이에 펜이 긁히는 소리만 이어졌다. 그는 써 내려가며 중간 중간 멈칫했다. 하지만 결국 끝까지 적었다. 그리고 서명했다.

‘최.용.과.’

서명을 마치고 종이를 건넨 용과 차장은 완전히 기가 꺾인 얼굴이었다. 용과 차장은 종이를 건네주고 나에게 3백만원을 입금했다.


용과 차장은 변제 계획을 적은 각서를 다 써서 서명한 후 나에게 건넸다. 나는 그 종이를 ‘최용과 차장’ 파일에 끼워 가방에 넣었다. 용과 차장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플라스틱 파일을 다시 한번 흘끗 바라보았다. 불편한 표정이었지만 아무 말이 없었다.

”약속 지켜 주세요. 저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어, 어…미안해. 라임씨…”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에서 용과 차장이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주라도 하는 건가. 세상 찌질하기는. 아무려면 어때,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카페 문을 나와서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철에 타고, 자리에 앉았다.


주변에 용과 차장이 확실히 없다는 걸 확인하자…

”헉……하아……“

긴장이 풀렸다. 등을 의자에 기대며 참아왔던 깊은 숨을 토해냈다.

반쪽짜리 승리였다. 다 받아내지는 못했다. 천 만원 중 삼백만 먼저. 나머지는 매 달. 어쨌든 상사에게 돈을 빌려주는 미련한 행동을 했다는 것이 나를 부끄럽게 했다.

그래도 나는 해냈다.

아내는 혼자서 이사짐 정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 중고책을 박스에 담아 알라딘에 판다고 했는데.

맛있는 저녁을 먹자고 하자.

모든 걸 다 고백하자.

그리고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과하자.

다시는 이럴 일이 없을 거라고 약속하자.

아내에게도, 나 스스로에게도.

그리고 이런 한심한 남편이라 미안하다고.

하지만 최선을 다해 해결해 냈다고.

어쩌면..

아내가 용서해 줄 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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