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영 빅세일에 털린 지갑

by 레일라노트

쥐꼬리만 한 월급이 벌써 동나간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 나는 올리브영 빅세일에서 18만 원어치를 긁었다.

원래 계획은 단순했다. 다 떨어져 가는 선크림 하나, 스킨 하나. 그게 전부였다.

나는 그 두 가지를 사기 위해 앱을 켰다.

그런데 손가락 몇 번 움직인 사이, 나는 어김없이 브랜드가 만든 구조 안으로 들어서 있었다.



#1. 브랜드가 만든 구조 안으로 들어서다


앱 첫 화면에 뜬 문구들은 익숙했다. "올영 특가", "1+1", "딱 하루만! 오늘의 특가"

직업상 다년간 MD로 일한 나로선 수도 없이 기획해 온 문장들이었고, 이러한 문구쯤은 한눈에 걸러낼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스크롤을 몇 번 내린 순간, 내가 평소에 관심 있었던 제품들이 정확히 그 세일 품목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이성보다 감정이 먼저 반응했다. 게다가 타이머를 보니 해당 제품의 남은 세일 기간은 단 5시간.

"이건 안 사면 손해잖아?"라는 생각이 들었고, 타이머라는 UI의 구조로 설득당한 순간이었다.


동시에 다른 플랫폼에서 가격 비교까지 해보니 올리브영이 진짜 최저가더라. 그 순간부터 나는 이미 스스로를 ‘합리적인 소비자’라고 믿고 있었다.

물건을 담을수록 이상하게도 뭔가 이득을 보고 있다는 착각이 더 커졌고, 결국 나는 아주 자연스럽고 정교하게 설계된 소비 동선에 유입되었다.



#2. MD와 마케터는 이렇게 판을 짰다


올리브영의 세일은 흔한 가격 프로모션이 아니다.

그들은 매출을 만들기 위해 소비자 감정과 구매 타이밍을 설계한다.


1. ‘오늘의 특가’로 시간 압박과 긴박감을 만들고

2. 카테고리별 랭킹, 알고리즘 기반 추천 상품은 관심 유입을 이끈다.

3. 1+1, 카드 제휴 할인, 사은품 증정 등은 복합적으로 이득 프레임을 형성한다.

4. 올영 어워즈 수상작과 수천 건의 리뷰는 품질에 대한 신뢰를 보증한다.

5. 마지막으로, 인플루언서의 추천 콘텐츠가 결정을 확정 짓는다.

이 모든 흐름은 단순히 팔기 위한 구조가 아니다.


브랜드는 이렇게 소비자의 심리 안에 다음과 같은 인지 루프를 만든다

인지 → 탐색 → 비교 → 확신 → 구매


브랜드는 사용자가 언제, 무엇을, 어떤 감정으로 구매하게 될지 처음부터 끝까지 동선을 설계해 둔다.



#3. 소비자의 마음은 그렇게 움직인다


장바구니를 채우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

“이건 원래 사고 싶던 거잖아”, “이 가격이면 두 개 사야지”, “내가 좋아하는 유튜버도 추천한 제품인데”

그 순간 나는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었다. 정보를 수집하고 비교하고, 합리성을 검증하며 스스로를 '기획자'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 모든 과정 자체가 브랜드가 짜놓은 구매유도 루트 안에 있었다는 점이다.


내가 18만 원어치 화장품을 담은 건, 단순히 내 의지가 약하거나 통제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건 브랜드가 정교하게 설계한 흐름에 반응한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4. 나는 그 안에서 기꺼이 당하고 싶었다


결제 직전,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댕이득을 보고 있어.”


올리브영은 나에게 화장품만 판 게 아니다.

절제하지 않아도 되는 면죄부, 합리적인 소비자라는 자기 인식,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는 만족감을 함께 팔았다.


브랜드가 파는 건 더 이상 제품만이 아니다.

'나는 이득을 보고 있다'라는 감정, '나는 잘 샀어'라는 믿음, 그리고 '꼭 지금이어야 돼'라는 확신.

그리고 그걸 아주 정교하게 UI, 리뷰, 가격, 프레임이라는 이름의 장치들로 만들어낸다.

그래서 마케터라면 소비자가 "왜 샀는가"를 묻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왜 잘 샀다고 느끼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나는 카드만 긁었을 뿐, 결제버튼은 브랜드가 눌렀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기꺼이 당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9월 빅세일에도 당할 준비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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