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태어날 때부터 우유를 쭉쭉 먹은 준이는 조리원 퇴소할 때쯤에는 한 번에 100cc도 거뜬하게 먹었다.
모유도 잘 먹고 분유도 종류 가리지 않고 다 잘 먹고 영유아 검진에서 상위 1%라는 결과서를 보며 별 것 없는 자부심도 가졌는데 지금의 준이는 편식 왕이 되었고 나는 집착 마녀가 돼버렸다.
이유식 1단계인 미음을 뱉어내고 거부했을 때 그런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하여 조금 기다렸다가 바로 2단계로 넘어갔고 몸무게는 쭉쭉 늘고 있어서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중기부터는 이유식을 잘 먹어서 엄청 신났었는데 과일을 도통 먹지 않아 이상하다 했지만 나중에 다 먹겠지 생각했다. 첫 돌이 지나 어린이집을 시작으로 밥과 반찬을 먹기 시작하면서 편식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
먹는 음식은 참으로 매정하게도 달랑 5가지였다.
밥, 소고기, 국물, 물, 치즈
우유는 잘 먹으니 영양결핍 걱정 안 해도 되니 다행이라며 친구들이 위로해 주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과 걱정이 더해지면서 나는 밥에 대한 집착이 생겼다.
혹시 반찬이 맛이 없어 그러나 싶어 아기 밥 요리책도 사고 블로그에 나오는 아이반찬도 따라 해 보고 반조리 아기 반찬은 브랜드별로 다 사보았다. 그래도 여전한 아이를 보며 편식 관련 글은 죄다 찾아 읽었다.
- 푸드 포비아
- 혀의 감각이 예민해서
- 유전적 이유
아이는 손에 뭐가 묻으면 질색하고 울었다. 그 흔한 밀가루 촉감 놀이도 제대로 못했다. 문화센터에서 또래 친구들과 함께하면 괜찮을까 싶어 재도전을 해보았지만 밀가루가 손가락에 닿자마자 울며 나에게 안겨서 내려오지 않았다.
한창 이유식 할 시기에 복직하느라 신경을 쓰지 못해서 그런 걸까.
내가 일하지 않았다면 괜찮았을 텐데.
남편의 편식 성향을 닮은 걸까.
별별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특히 저녁밥을 거의 먹지 않은 날은 배고픔에 새벽에 깨서 울었고 우유로 배를 채운 뒤 잠이 들었다. 나는 2년 내내 이어진 밤중 수유로 신경은 날카로워졌다.
아이에게 다양한 음식을 경험하게 해 줘야 된다는 의무감에 늦은 밤 홀로 주방에서 결국 먹지 않는 반찬을 만들기 위해 겨우 남아 있는 정신력마저 소진해 버렸다.
아이가 한 숟가락 먹으면 웃고 한 숟가락 뱉으면 한숨이 나오고 먹지 않겠다고 고개를 돌리면 애원했다가 아이가 손을 흔들다가 식판이라도 뒤집어지면 내 눈도 내 속도 다 뒤집어졌다.
오늘도 역시나 지침과 화남 그리고 후회의 지옥을 경험한 늦은 밤,
오늘은 반찬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될 것 같았다. 혼자 소파에 누워서 반찬 검색을 하다가 남편이 지나가듯 한 말이 생각났다.
"밥이랑 반찬을 꼭 먹어야 되나"
"다른 걸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다른 나라 아이들은 밥 안 먹잖아, 그 애들은 뭘 먹지?"
외국 애들이랑 체질이 다른데 비교하는 것이 말이 되냐고 생각했다가 초록창에 검색해 보았다.
진짜 미국은 유럽은 아이들이 뭘 먹을까.
단순한 궁금증이었다.
팬케익, 토르티야, 피자, 블루베리, 베이비 캐롯, 바나나...
주 식사인데 이렇게 먹어도 되나?
이건 간식 같아 보이는 음식들이어서 스테이크 햄버거 뭐 이런 거 따로 먹는 건가 싶었다.
그리고 읽게 된 해외 거주 중인 한국인 엄마의 블로그에서 아이의 편식으로 고민을 하고 있는 글을 보았다.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하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은 다 똑같았지만 식탁에서의 모습은 나와 달랐다.
엄마는 좋은 음식들을 준비하고 그 음식들 중에서 무엇을 얼마나 먹을지에 대 선택권은 오롯이 아이에게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아이에게 무엇을 얼마나 먹을지 강요했다. 나의 고집과 고정관념을 바탕으로 내 마음대로 세운 식사 기준이었다. 나는 나만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먹기 싫으면 고개를 돌리거나 뱉으면 그만이니.
아이 역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면서도 몰랐다.
'밥 먹자'라는 말만 했을 뿐인데 갑자기 울던 일도 있었고 밥을 차리고 있으면 거실에서 놀던 아이가 이불속으로 들어가 숨어 있기도 했다. 낯선 음식을 올려 두었을 뿐인데도 얼굴을 찌푸리다가 '골고루 먹어야지' 하는 말 한마디에 이내 울음을 터트렸다.
무조건 한입이라도 먹이겠단 생각에 아이의 표정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보았지만 그냥 못 본 척했던 것을 깨달았다. 고집을 부린 것은 아이가 아니라 오히려 나였다.
밥이 뭐라고.
아이가 밥 먹는 것을 더 무서워하기 전에 나의 집착을 반성했고 고집을 내려놓기로 했다.
완전하진 않지만 먼저 아이 그릇에 음식을 담는 방법부터 바꿨다.
매일 아이가 좋아하는 고기는 제일 큰 칸에 담아 주었고 새로운 음식은 제일 작은 칸에 아주 소량만 담거나
같은 식판에 담겨 있는 것도 싫어할 때는 작은 그릇에 따로 담았다.
꼭 먹지 않더라도 눈으로 이런 음식이 있다는 것을 보게끔 해주었다.
그리고 나의 노력에 비례하여 아이가 잘 먹길 바라는 기대감이 커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밥을 차리는 나의 수고를 조금 내려놓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무조건 엄마가 직접 만들어야 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했다. 동네 유아반찬 가게를 찾아서 간단한 반찬은 사서 먹였고 반조리 식품으로 시간을 절약했다. 덕분에 비축된 나의 체력과 정신력은 아이의 반찬 투정을 충분히 받아주고 다독여 줄 수 있었다.
새로운 음식을 올려두었을 때는 아이가 친근감을 가질 수 있게 구연동화처럼 반찬이 직접 자기소개를 하는 것처럼 말했고 먹어 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만 먹겠다는 아이에게는 '한 숟가락만'이란 말 대신 '그래'라는 말을 해주었다.
나의 노력을 아이가 알아주길 강요하지 않았고 먹지 않음에 한숨 쉬지 않았다.
밥과 고기만 쏙 먹고 자리를 뜨는 아이에게 '오늘은 준이가 힘이 센 티라노로 변신했네'라고 칭찬을 해주었다.
이렇게 한 달을 보낸 지금은 양념이 들어간 음식들을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불고기, 족발, 단호박, 고구마, 감자, 바나나, 시리얼, 요플레, 핫도그, 치킨너겟, 후라이드 치킨.
먹는 음식들이 나름 많이 늘었고 낯선 음식들을 보자마자 우는 일은 없어졌다.
조금씩 발전하고 있는 준이가 먼저 한 입만 먹어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역시 편해졌다. 아이도 나도 밥이 차려진 식탁이 두렵지 않았다.
그깟 밥이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