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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마망 Jan 06. 2022

뜨겁진 않지만, 마흔의 열의



한 달 전이었는데 벌써 작년이라 말해야 되는 12월.

아주 오랜만에 친구와 저녁을 먹었다. 20대 마지막 열정을 불태웠던 회사에서 함께 한 친구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누군가를 만나면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그 사람을 처음 만났던 그때의 나로 돌아간다.

아득해진 예전의 내가 문득 그리울 때가 있다. 연말이라 그런지 마음에 허기를 느꼈다. 29살의 활기차고 열정 가득했던 나와 함께했던 친구가 보고 싶어서 연락했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서 친구를 기다리는데 29살의 나를 기다리는 것처럼 설레었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거라 라디오 스타에 나온 게스트처 근황 토크부터 시작했다. 최근 근황을 알아야 서로 고민을 이야기할 때 적절한 반응과 조언해줄 수 있다는 우리들만규칙이다.

사실 코로나 시국에 근황이랄 것도 없었다.

친구는 아직 미혼으로 코로나가 심해진 작년부터 거의 재택근무만 하고 있어 생필품 구매 외에 외출은 한 달만이라고 한다. 나 역시 퇴근 후 바로 집이었으니 80cm였던 아이의 키가 100cm를 넘어선 거 말고는 큰 변화는 없었다.

미혼인 친구의 지나간 연애 이야기를 들으며 예전에 연애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우리의 29살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래, 우리 그랬어! 그때 기억나? 창립기념일 회식인데 연말 클럽 파티 가려고 몰래 빠져나와서 택시를 잡았잖아!"

"맞아! 택시인 줄 알았는데 대표님 차였어."

"대표님이 우리 보고 밤길 위험하니깐 모범택시 타라며 거금의 택시비 주셨을 때 이 회사에 뼈를 묻겠다고 생각했다니깐."

"나도 그랬었지. 근데 내 뼈를 묻을, 아니다. 묻어 줄 회사는 세상에 없지."

"요새 재택근무만 해서 그런지 회사 다니는 기분이 안나. 내가 직장인이라는 걸 깜박해."

"나는 칼퇴해서 곧자 하원하러 가야 되니깐 일 많은 회사나 직책을 맡는 게 좀 꺼려져."

"어릴 땐 팀장님이 집에 가라고 해도 안 가고 일했었는데"

"맞아! 그리고 재밌었어. 그땐 일이"

"지금 생각해보면 뭐든 다 재밌었어. 야근을 해도 주말 근무를 해도 그리고 퇴근하고 한잔 마시며 노는 것도"


29살엔 뭐든 재밌었고 열심히였다. 거의 대부분이 새로운 것들이 었기에 어떤 일이든 무서움 없이 달려들었다. 그때의 팀장님들은 그런 우리들에게 열정이 남아서 넘친다고 했다.

열정을 받쳐줄 만큼 체력도 좋았다. 힘든 야근을 하고도 우린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모여서 술 한잔은 마셔야 했고 아침이면 회사에서 또 볼껄 알면서도 새벽이 되어서야 아쉬워하며 각자 집으로 갔다. 주말에는 집에 그냥 있는 것은 심심했고 지루했다. 항상 재밌는 일이 없을까 하며 친구들과 계획을 세웠다.

어떤 날은 썸남의 메시지 때문에 속상하다며 친구들을 소환했고 친구들은 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며 조언을 쏟아냈다.

소개팅을 하고 온 다음날이면 여자 화장실은 수다로 가득 찼다. 못다 한 이야기는 점심시간에 하기로 하고 서둘러 자리로 돌아가서는 메신저로 또 대화를 이어갔다.

업무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은 날이면 어김없이 동기들이 자기 일인 것처럼 같이 떠들어 주었고 그 일을 핑계 삼아 퇴근 후에는 다 같이 모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별거 아닌 일이다. 인생에 점 하나 찍지 못할 별거 아닌 일로 29살의 나는 웃고 울고 화내고 그랬다. 그땐 대리 승진과 원하는 이상형의 남자와 뜨거운 연애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

대단하게 여겼던 29살 나의 목표는 단순했고 명확했고 오로지 나만을 위한 꿈이었다.

그래서 열정을 불태우고도 다음날이면 새로운 열정이 다시 샘솟았던 걸까.

평범하다 생각했던 그때는 젊음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빛나고 있음을 몰랐다.

모르고 지나쳤기에 지금 더 그리워하는 걸까.

마흔이 된 나는 허무맹랑했지만 뜨거웠던 29살의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부럽다.


"벌써 마흔이야. 코로나로 갇혀 살다 보니 세월 가는지도 몰랐어"

"그러게. 코로나에 갇힌 건지 육아에 갇힌 건지는 몰라도 그냥 한 해가 끝나가네"


별일 없이 보낸 한 해가 더없이 잘 보낸 코로나 시국이니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해야 했다.

2년 전만 해도 친구와 함께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시간만큼 보낼 수 있다는 것 또한 소중한 일이 될 거라 생각 못했다.

뭐든 당연했던 그래서 더 무심했던 것들이 손가락 틈새로 빠져나간 지금에서야 소중하다는 것을 느꼈다.

매일 아침이면 다시 채워졌던 나의 열정이 영원할 줄 알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움 보다 익숙함이 많아졌고 내 앞가림만 하면 되던 시기가 끝나고 누군가를 이끌어 줘야 되고 보살펴 줘야 되는 책임과 엄마라는 역할이 추가되었다. 꿈이라는 단어 대신 노후를 준비해야 했다. 당장 오늘도 몇 번의 무너짐에 정신 차리느라 바쁜데 노후라니 감당할 것들이 하루가 지나면 한 가지 더 늘어나고 있었다.


뜨거웠던 열정은 서른이 넘으면서 식었고 마흔이 되자 태워진 흔적만 남았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열정을 애써 찾지도 않았다. 해야 할 일과 책임이 더 많아진 지금은 뜨거운 열정 보다는 따뜻하게 오랫동안 잘 버틸 수 있는 열의가 더 필요하다. 열정의 시절이 그립고 부럽지만 그렇다고 열의로 못하는 일은 없다. 그렇다고 열정을 다시 살리기도 어렵다. 숙련된 경험치와 열의가 만났을 땐 시너지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 제법 뜨끈해진다

그래도 바닥난 체력은 어쩔 수가 없다. 세월에 장사 없다고 했던가, 체력이라도 좀 아껴 쓸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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