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영화, 그 생명의 퍼즐을 향해
다가서는 거리와 떠나가는 온도를 정하는 것은 눈치채지 못하게 스쳐가는 눈빛인지도 모른다. 겉도는 긴장하는 감정이 없는 예민한 슬픈 연약한, 그 사이사이의 만져지지 않는 층들이 비워지거나 또는 서로 부대낄 때 흐릿하게 떠올랐다가 이내 가라앉는 여운을 머뭇거리며 지난다.
그 시간의 어디에선가 잡혔다가 떠나가는 빨간 기척이 다른 시간에 슬픔이 되었다가 시작이 된다. 누구도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는 흔적의 깊이를 균일한 시간 사이에 불규칙한 감성으로 배치한다.
게으른 움직임을 따라 흘러내리는 안타까움은 세상을 등지는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바라본 심장에 각인되는 공허다. 동시성을 받아들였다면 집착의 끈을 떼어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도대체 정말 그럴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파도의 흰 끝을 따라 아이가 걸어가는 길, 그녀의 카메라 렌즈가 몰입하던 그 시간을 뭉텅 떠갔던 막힌 방파제, 그곳을 떠나며 잠시 들른 그녀의 이른 향수를 그 시간과 공간은 각각 기억할 것이다.
시공을 유영하던 감각의 꼬리들이 이어지며 언어가 품은 무한의 차원을 향해 떠돈다. 진한 감정을 파고드는 찌푸린 인상과 어색한 순간들을 지나는 각기 다른 장소에서 너무도 정확하게 겹쳐지는 언어들, 그들이 충돌할 때마다 오히려 심장의 겹겹은 분열되는 격정을 참아내며 숨을 멈춘다.
아버지의 연기가 생존이어도 유혹이어도 좋다. 어머니의 정갈하게 계획된 우아함이 가식이어도 괜찮다. 좁히고 싶지 않은 거리를 꾸역꾸역 다가가며 굵어지는 미간 주름과 서로에게 떠미는 위태로운 경계에서 누가 먼저 어색한 웃음을 건넬지 어느 순간에 먼저 끝이라고 말할 건지 끝없는 멈칫거림이 어색하게 시간을 나눈다.
동물의 세계처럼 새끼를 독립시키고 나면 끈적한 피로 이어진 연이라도 책임과 의무나 전통이라는 무게를 지우지 않는 자연스러운 무한한 독립의 자유를 허락해야 하는 건 아닐까.
너무 예상 가능한 의존의 기대가 새끼의 여전한 비루함을 눈치채게 하고 이내 해방될 그 가벼운 흥분의 목소리는 경계의 문을 나서며 흔적 없이 휘발되고 만다. 거짓과 위선과 부끄러움이 순전히 연약한 새끼의 몫이어만 한다면 그보다 더 가혹한 건 없다.
그 뒷모습을 향한 허망한 무책임은 그 어머니의 어머니, 그 이전의 어머니의 어머니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국은 관계의 중첩이 어디까지 허락되어야 하고 지어져야 할 무게는 얼마큼이어야 하는지, 보이는 고독과 허무 사이에서 누구든 스스로 그 두께를 직시해야 할 것이다.
인정하고 끌어안을 용기를 낼지 그럴듯한 연기로 자신이 아닌 모습으로 무대에 오를지, 인간의 마음이 가진 두께와 심장의 온도는 자신도 알 수 없을 때 예기치 않은 순간을 맞는다. 같은 시간에 동일한 자궁을 공유했어도 파편이었다가 뜨겁게 휘도는 애도의 가장자리가 위안으로 봉합되며 불투명한 미래를 향한다.
하지만 여전히 참을 수 없는 내 순간들을 위한 위안 또한 찾아 나선다. 이처럼 아름다운 장면에 머물며 시간에 팔 벌렸던 나를 기억하리라.
겹겹의 다른 시간과 층층의 먼 공간에서 나누었던 아름다운 최선의 대화록이다. 삶의 건조한 거리를 그대로 보여주지만 가끔은 다른 꿈을 꾸기도 하면서 결국 자신만의 속도로 앞으로 나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Father Mother Sister Brother OST - Spooky by Dusty Springfield, 1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