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영혼 없는 번아웃
이걸 해야 해, 반드시 그걸 먹고 그곳에 꼭 들러서 순서대로 이렇게 저렇게 요렇게 해, 후회하지 않을 거야. 아, 그리고 흥정도 잊지 말고!
계산도 못하는데 흥정을 한다는 건 시간 낭비다. 부르는 사람의 부푼 부레만큼 지불한다. 진실이 기대를 지나 허황으로 간다 해도 지독한 악의가 아니라면 찰나의 횡재려니 관대해도 괜찮다.
후회는 귀로 들어오는 반강요의 호의라고 착각하는 소리다. 이 사람이 여기 왜 왔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관심밖이다. 무례한 웃음과 리듬을 깨는 목소리 만으로 이미 고급 백화점 안을 한바퀴 돌리고 만다.
사진으로만 보던 커다란 탈것에 침 튀기며 부추기는 사람의 눈을 피한다. 피곤한 시간을 피해 눈을 감는다. 땅을 겹겹으로 덮고 거기에 시멘트를 부어 만든 칸칸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박수를 친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을 따라 기진한 영혼을 흘려보낸다. 한강의 아름다운 다리들을 건너던 순간들이 그립다. 다시 건너게 될 다리들, 밤이면 찬란한 빛의 갖가지 등을 달고 호객하는 건 어디나 같다.
혼자 있어서 가장 편한 건 먹고 싶지 않을 때 안 먹어도 된다는 거다. 끼니라는 말이 부담스럽고 두렵다. 4일 동안 먹은 건 과일 서너 개, 야채 두어 접시와 아몬드, 달걀 열개쯤과 커피, 그리고 페퍼민트 차다.
한 끼로도 하루를 보내는 가벼움이 좋다. 물론 누군가 폭발하게 만들면 알코올 칼로리가 높아지긴 한다. 툭하면 부딪혀 동물적 본성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러지 않으려 애쓴다. 회색 바라클라바로 눈빛을 가린다.
할인 가격이 붙은 버건디 백을 골랐다. 그게 첫 사건의 시작이었다.
가방을 계산하려 데스크에 올려 둘 때 까지도 이미 줄 서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계산을 마치며 직원의 찌푸린 얼굴과 계산대 앞 높은 가벽 앞에 레게머리를 한 남자가,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한다.
가벽의 색과 너무 비슷한 옷을 입은 그를 내가 눈치채지 못한 건 내 눈이 심하게 삐어서다. 세상 곳곳이 한 덩어리로 보일 때는 어쩔 수 없는 실수를 한다. 어떻게 치르던 대가를 치르면 된다. 으쓱했던 그의 어깨가 잔상으로 오래 남을 것이다.
어디를 가도 맛집이라는 곳으로부터 달아오르는 기름 냄새에 기웃거린다. 저걸 다 맛봐야 한다면 위장의 안팎과 몸뚱이와 팔다리가 적응하지 못하고 아우성칠 것이다. 산화되는 프라잉팬을 보다가 돌아 나온다.
외부로 오는 초대와 유혹에 흠씬 빠져야 제대로 산다고 믿는 건 자신을 살지 못하는 것이다. 먹는 것도 경쟁, 가격 흥정도 자랑해야 할 능력, 돌고 도는 각지에 발을 올렸다 인증까지 해야 하는 피곤을 감수하며 공허를 채운다.
두 번째 낯선 사건으로 간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모른다. 그냥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