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종이를 만지다

05 쌓을 시간들을 기다리며

by 서희복

태어난 세상이 디지털인 젠지(Gen Z)에게 종이는 잊는 것이 느렸으면 좋을 시간이다. 자연으로부터 온 거친 촉감 위에 놓아 둘 기억이다. 눈을 감으면 저절로 더 생생해지는 온전한 순수를 가둔다.


시간을 살수록 해체되는 껍질을 그대로 털지 못하고 끈적해지는 불안에 멀찍이 떨어져 바라다본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존재의 증거들이 하나씩 깨어나도록 계속 움직이는 거다.


새로운 곳을 딛는 건 지금까지의 익숙함에서 조금 멀어지려는 용기다. 익숙함 조차도 매일 다른 긴장의 연속이라도 서로를 잇는 긴장의 경계는 마주 보며 게을러지기 쉽다. 권태는 늪이다. 아주 조용히 천천히 미지근함 속으로 사라지게 한다.


디지털이 만나는 느린 종이의 시간들, 오래 손에 쥐고 마음에도 두도록 한다. 인간이 짧은 시간에 상상하지 못할 어느 지점에서 소멸하거나 엄청나게 변할 수도 있다. 쌓인 시간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대뇌피질에 남은 좋은 기억들과 아픈 통증들을 고유한 그들의 몫으로 남겨두는 일의 가치를 생각한다. 개인적인 아주 개인적인. 수직이 아니라 순수한 수평으로 사는 길은 스스로와의 약속이다. 고차원의 이랑과 고랑 사이를 순환하는 개별의 아름다움을 남기는 시간을 꿈꾼다.


아무것도 미리 알 수 없는 첫날의 흥분에 심하게 흔들리는 심장, 그 불안의 가운데로 희열이 온다. 서 있는 그 상황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이 그 공간을 가득 채울 삶이다. 상상하고 또 긴장한다.


어떤 아름다움이 기다릴지 어떤 목소리에 귀 기울일지 어떤 색깔을 마주할지 모른다. 배운다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다. 새롭지 않은 기본 안에서 스스로의 독창적인 시간을 찾아가는 길이다.


까탈스러운 눈이 불안에 흔들릴 것이다. 어떻게 부딪혀야 할지 몰라서 엉거주춤 움직일 것이다. 첫마디가 무엇일지 첫 눈빛이 어디를 향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어떤 방식으로든 부딪히며 시작한다.


선택해야 할 것들이 무수한 시간 속에 이리저리 휘돌고 있다. 제자리를 찾지 못하다 문득 내게 오는 그 순간을 잘 지켜내고 싶다. 시간을 앞지르고 싶은 두려움은 그럴 수 없기에 더 커진다.


가져보지 못한 미래를 지금 꿈꿀 수 있는 건 한동안 가까워지던 지루함의 늪과 주위를 맴돌던 허무를 떠날 문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람으로부터 온 무례와 불온한 태도의 결과지만 지금은 덕분이라 부른다.


돌아가는 길이 어느 방향으로 이어질지는 모르겠다.


열리는 그 길로 들어갈 것이다.


느릿느릿 책 짓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