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 또는 접촉

09 [영화] 하우스메이드 by 폴 피그 감독, 2026

by 서희복

나의 생어금니 발치는 나의 강한 의지로 내 삶의 큰 편의를 준다는 이유로 합법적인 기관에서 전문가의 황당한 표정으로 이루어진 작은 소란이었다.


그곳의 모든 것과는 정반대라는 거다. 위치도 의지도 안락도 법도 전문가도 없는 시간, 게다가 시각적 청각적 심리적 불협화음을 갖추고 있는 뾰족한 창문이 달린 그곳에 다녀왔다. 삶의 협주곡이 아름다웠던 세상이 뒤집힐 때 누구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다소 지루함의 끝에서 칼자루를 쥔다.


드러나는 세상의 모순과 닿지 않는 삶에 대한 존중이 아쉬운 세상이다. 거기나 여기나 한번 생긴 표식은 없어지지 않는다. 통통한 아기 때 접혔던 팔 안쪽의 가로 주름이 전생에 구걸하던 깡통을 걸었던 자리라던 우스갯소리가 뜬금없이 생각나는 건 한 사이클의 생이 끝나야 조금 얇은 주름으로 다시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났기 때문이다. 내 양쪽 팔의 두툼하게 앉은 주름은 전생에 먹여 살릴 가족이 많아 깊숙한가 보다. 그 큰 깡통의 무게가 주름 두께에 고스란히 나타나는 그런 맥락 없음까지 가 닿는다.


자기 하나 제대로 먹여 살리기 힘든 경제적 독립이 도대체 가능하지 않은 세상이다. 과거가 잡는 발목 때문에 아무리 걸어도 제자리 늪 속에서 완전히 다른 유혹에 빠지기 쉽다. 드디어 행복이 오는 것 같고 문득 욕심의 시간이 스멀스멀 길어지고 마침내 다 얻었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가장 위험하다는 걸 아는데 까지 질질 느리다.


그 지루함을 19금 살빛으로 채우려는 의도가 너무 보이긴 했지만 점점 드러나는 스릴러적 요소가 비릿한 젖내를 풍기는 듯한 회의실에서부터 유아적인 광증과 집착이 뼛속까지 스민 인간 심리로부터 조금씩 드러난다. 꽤 오랜 세상과의 단절에 합당한 이유가 당황스러워서 있는 자와 없는 자가 마주하는 벽의 두께와 색깔을 생각하게 된다. 그녀와 동일시되는 그 지점이 가슴 아팠다. 순진하게 덥석 남의 옷을 입는 그녀에게서 들뜬 신데렐라를 본다. 볼 때마다 달콤하게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 같은, 그곳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가 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한 번쯤은 지나치고 싶은 환상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받게 되는 고통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을 거라 상상할 수도 있다. 그러다 찢기고 달아나는 것 마저 쉽지 않을 때 여전히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살아온 날만큼 이기적이 되고 멀어지는 거리만큼 불편한 거리를 아이는 정확히 알고 있다.


그렇게 삐걱거리는 사소한 위태로움에 커다란 무언의 도움과 희망을 본다. 악마적 미소가 빠져나가며 추락하고 모성의 집착적 의심은 여전하지만, 그들의 연대에는 이유가 있다.


그 마지막을 반전이라 부른다.



▶ 포스터: The Housemaid from I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