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어떤 인간 군상들에 대한 매우 사적인 비애
아버지가 농부인 해덕이는 자연을 사유할 줄 아는 조용하고 내적으로 침잠한 사람이었어. 그 동네는 타지에서 온 사람들에 대한 경계가 엄청났지만 겉으로 표시는 하지 않았지. 그런 게 본질적 위선 아닌가. 하긴 나도 너도 보통 사람들도, 특히 힘이나 명성이 있는 사람들은 더 교묘히 숨기는 데 전문가거든.
해덕이는 교회도 다니며 신실했나 보더라. 집안에서는 해덕이가 가톨릭 사제가 되길 바랐지만 신경성 천식에다 심장이 약해서 신학 대학을 그만두게 돼. 신경성 천식이라니 보통 '신경성'이라는 말은 예기치 못한 심리적 발작이 올 수 있다는 불안을 전문 용어로 말하는 거 아닌가.
20대 초반을 지나며 철학에 입문하는 해덕이, 무슨 무슨 철학 대가에게 배우시 시작하지. 나는 '대가'라는 말에 알레르기가 있긴 하지만 세상이 그렇다니까 뭐. 보통 대가의 이름이 필요하고 그 이름에 누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열라 노력들을 하지. 그런 것들이 순수한 지식에의 열망이 아니라 힘으로 쏠리는 보이지 않는 야망으로 쉽게 변질되곤 해. 인간들은 너무 심심한지 이파 저파 찬성파 반대파 너무들 경쟁하고 투쟁하는데 익숙한 거 같아.
해덕이는 20대 중반에 박사를 받고 후반에 논문 쓰고 교수 자격을 얻어서 대학 강의를 하게 되었어. 그러면서 30대 들어서자 유명 교수의 조교가 되고 그 교수의 다른 제자, 자기보다 대여섯 살 많은 영수와 친구가 되는 거야. 해덕이와 영수는 서로 뭉쳐 현실 위기를 타파하자는 생각이 같았어. 하지만 자기 동네 출신이 아니고 타지 혈통의 부인을 가진 영수에게 해덕은 무심하게 아무 일도 아닌 듯 상처를 주지. 나중에 변명에 변명을 더하며 자신을 정당화할 때 아마 영수 가슴이 찢어졌을 거야. 상처를 입은 사람에 귀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가해한 사람의 권력에 기울어지는 게 사람 심리니까 뭐 이해 못 할 것도 없지.
30대 중반을 넘어 철학파 거장의 후임으로 대학 조교수가 되고 그때 부인인 엘프가 근처 자연 속에 그가 조용히 자연 속에서 사유하도록 통나무집을 마련해 주지. 그 사유의 깊이로 세상을 매료시키는 큰 이름이 되지만 사유가 너무 깊으면 두려움 없는 리더가 되기 위해 죽을 때까지 자신의 과오 따위는 없었다는 듯 주위 사람들을 최대한 이용해 정당화시킬 수 있는 삶을 살게 되나 보더라. 나는 지금 해덕이가 짠하고 억압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가여운 영혼이라 생각하는데 세상은 그의 큰 이름에 풍덩 들어가 큰 잘못들은 아무것도 아닌 듯 치부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받들고 살고 있어.
여하튼 그 대학에서 철학 강의로 이름을 날리던 때 아렛이 철학과 신입생으로 들어왔지. 해덕이 중요한 책 집필을 막 끝냈을 때였어. 성장 과정이 좋지 않았던 아렛은 아마 누군가 전적으로 기댈 사람이 필요했던 거 같아. 매독으로 죽은 아버지, 재혼한 어머니와 사이가 많이 나빴어. 입학한 대학에서 학생들을 매료시키는 철학 강의를 하는 해덕이에게 빠진 건 심리적 결핍으로 시작한 걸로 보여. 하지만 똑똑하기 그지없는 얘네 둘은 영악하고 정치적인 사랑에 빠졌어.
해덕이네 동네에서 온 순수 혈통 부잣집 여자애, 엘프와 결혼했으면서도 해덕이는 아렛에게 푹 빠졌지. 철학적으로 심리적으로 서로에게 힘이 되었던 것 같아. 아렛은 해덕이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교묘하게 해덕이를 위로했어. 당신의 철학과 삶을 이해할 사람은 나 밖에 없어 그런? 해덕이는 아렛이 말없이 가만히 자기만을 들어주고 끄덕여 주기를 원하는 이기적인 사람이었지만 아렛은 자신의 본성을 꾹꾹 누르며 꾸준히 조용히 계속 끊임없이 들어주곤 했어.
둘이 만난 지 삼 년쯤 후 해덕이 낸 책이 순식간에 유명해지면서 둘의 관계는 기만과 가식이라는 포장지로 그들 각자의 삶을 겹겹이 덮게 되지. 사과하고 잘못을 인정하면 삶이 와장창 무너지고 쌓아둔 명성이 조각날 거라 생각했나 봐. 그들이 주변 지인들과 주고받았던 편지에는 서로가 필요할 수밖에 없음이 감정적으로 정치적으로 드러나는가 보더라.
해덕이 삶의 커다란 오점으로 남을 잘못을 바라보는 인간들의 모습을 읽었어. 난 해덕의 근본 철학을 크게 믿지 않아. 그저 큰 이름이 되려고 눈치 보며 틀에 맞춘 이론이라 생각하거든. 그런데 더 웃긴 건 잘못이란 걸 알면서도 쉬쉬하며 더러운 명성에 기생하며 살았던 아렛이야. 아렛은 영수가 개인적, 정치적으로 상처받았던 걸 알았으면서도 입 다물어 주기를 바랐어.
영수밑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며 그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으면서도 결국 몸과 마음의 지배자이면서 죽은 지금도 여전히 세상 철학을 지배하는 해덕이 편만을 든 거잖아. 더러운 삶의 공생관계였던 거지. 아렛마저도 지금을 흔드는 큰 이름의 철학자가 되었으니 말이야. 나쁜 년! 나로선 이해하기 불가에 용서가 안되네.
물론 얘네들은 내 이해나 용서 따위는 상관하지 않겠지만 나 같은 이름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더 충격으로 생각해야 할 거야. 모든 사람들이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지저분하게 공생하며 살지는 않거든. 그런 공생으로 만든 철학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기생하며 살고 있어.
아렛은 해덕의 과오는 실수라고 눙치고 영수는 해덕과 그렇게 제대로 끝내고 싶어 했지만 죽을 때까지 해덕의 사과나 진정한 만남은 없었다더라. 나는 해덕이 위선자라고 생각해. 다른 동네 한 모 씨의 침이 마르는 반복 모조 철학이 이제는 좀 지루해. 그 너머 동네 박 모 씨도 해덕의 팬인지 해덕의 과오를 순화시키고 정당화하려고 온 삶을 바치고 있는데 한마디 하고 싶더라고. 그로부터 깨달은 진심의 네 삶을 살아야지.
그리고 박씨! 당신이 언급한 책 중에서 아렛을 옹호하면서 해덕이는 천하에 나쁜 인간으로만 썼더라던 그 책, 내가 읽어봤는데 내가 살아온 삶에 비추어, 해덕도 가증스럽지만 난 아렛이 더 총체적인 난국이던데? 고학력의 미숙한 명성 집착녀, 하지만 아렛도 나중엔 해덕의 끊임없는 적재적소 변명과 거짓말에 질렸나보더라.
내가 골몰하며 뒤적였던 시간들을 현시점에 작은 결말로 마치자면 진실은 알 수 없다는 거야. 누구나 그 자신만의 이론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사람을 이해하고 집착하고 정당화하니까. 나도 마찬가지, 그래서 해덕이 싫고 아렛은 더 싫어. 영수도 엄청 이름난 철학자인데 아렛 꼬임에 해덕이 헹가래만 치다가 인생 한쪽 좃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