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엽편소설] 가장 늦은 안식

by 서희복

열네 시간의 비행으로 몽롱한 피곤을 헤매다 새로운 문 앞에 다다랐다. 해준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아무리 디지털 시대라 해도 전자 키번호를 주인으로부터 전송받아 문을 열어야 한다는 건 사생활 침해라 여겼다. 불안했지만 첫 메시지부터 예민하다는 인상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너무 눕고 싶었다.


같은 겨울이래도 비와 바람이 많은 겨울은 기온이 높아도 더 쓸쓸하고 외로웠다. 푹 내려썼던 모자를 벗어 옆구리에 끼고 머리카락을 지나가는 바람을 느끼니 마음이 조금 안정되는 것 같았다. 사십 년 이상을 살았어도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는 삶이라 계속 이어 살고 있는 거 아닌가.


문 안에서 무언가 드르륵드르륵 몇 번의 회전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해진 문을 밀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오른쪽 벽의 스위치를 눌렀다.


밝아지자마자 해준을 감싼 건 어디선가 맡아본 적 있었던 향이었다. 떠나온 곳에서 진저리 쳐왔던 그 향은 마치 현관 전등이 희미하게 비추는 오른쪽 침실과 욕실, 왼쪽의 거실 겸 주방을 소개하려는 것 같았다. 숨을 참고 얼마간 서있었다.


거실 두 면에 커다란 통창이 긴 세로로 두 개씩이나 나있었다. 가장 높은 층이 아니었다면 가까이 붙은 옆 아파트에서 해준이 무엇을 하는지 샅샅이 내려다볼 것이었다. 커튼도 블라인도 하지 않는 건 해준의 취향이었지만 마치 커다란 광장에 혼자 바람을 맞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침대의 협탁옆 공간에서 하드 케이스를 열었다. 항상 가지고 다니던 아메시스트 향을 면세점에서 사지 못했지만 기내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작은 향수 샘플을 열어 침실 이곳저곳에 뿌렸다. 해준이 맡아보지 못한 향이었다. 새 향수를 프로모션 하는 듯했다. 대충 씻고 시트 안으로 스며들듯 들어가 잠이 들었다.


문득 찰칵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현실감 없이 뜬 눈은 천장의 작은 초록색 불빛에 멈췄다. 낯선 색깔과 점멸하는 사이마다 불안이 쌓이고 있었다. 일어나 앉아 몸을 떨고 있다가 협탁 위의 초록색 화분을 보았다. 조화였다.


플라스틱 화분 안에 싱싱할 거라 믿었던 꽃에 손을 대자 손가락 끝에 뾰족한 자극이 전해져 저릿했다. 인공으로 주물러 만든 생명 없는 가짜의 흔들림에 속이 울렁거렸다.


시트를 몸에 감고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구석마다 크고 작은 화분들이 서있었다. 가구나 책장이 간결해서 공간을 푸근하게 채우려는 것 같았지만 조화를 알아볼 때마다 해준의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그나마 선인장류의 생명을 심어둔 화분들이 위안이 되었다. 오래 눈길을 주지 않아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흐릿하게 익숙한 향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었다. 조화 화분들을 보일러실에 들여놓았다. 구석의 세탁기 옆과 그 위에 가지런히 무생물의 생명인 척하는 것들을 가두고 문을 닫았다. 위선과 거짓으로부터 떠나 왔는데 왠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준이 뿌린 향이 모두 날아가기 전에 그 냄새를 아파트에서 없애고 싶었다. 해준을 뒤따라온 듯한 그녀의 잔향이 더 또렷하게 새겨지는 것 같았다. 그래 그거였어, 파렌하이트. 진한 가죽 냄새가 나는 깊고 센슈얼하게 집착적인, 남자를 위한 향, 그녀에게 머물러서는 안 될 그 향이었다. 한 달이나 지내게 될 아파트에서 나는 파렌하이트와 비슷한 향에 해준은 미칠 것 같았다.


해준은 자신이 예민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마 해준의 무심함에 편안한 가식의 웃음과 감정을 위장하는 물건들이 들어앉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에 대한 해준의 한없는 관대함이 그녀를 더 악마적인 대범함으로 끌고 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해준만 알고 그녀는 모르는 그 향기로부터 온 분노를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서둘러 비행기 티켓을 끊었고 그녀에게 연구를 위한 자료 수집을 한다고 둘러댔다. 혼자 여행도 하고 싶다는 해준의 말에 서운해하는 눈빛의 그녀가 해준의 목을 감았다. 그녀의 살에서 파렌하이트 향이 진하게 났다. 언제부터 그 향을 인지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해준 주위에서 그 향이 중첩되는 사람이 단 하나였다는 걸 알고 경악했던 순간이 생각나 해준은 그녀의 팔을 풀고 뒤돌아 마저 가방을 쌌다.


무던하다 여겼던 해준의 삶이 차츰 예민해지고 의심이 많아지면서 스스로 견딜 수가 없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어쩌면 오랜 동거로 익숙해져 평온하고 행복하게 동행한다 생각했던, 지금은 너무 낯선 그녀와의 사이를 억지로라도 벌릴 물리적 시간이 절실했다.


그때 왜 해준이 학회를 직접 가지 않고 조교를 보냈었는지 그게 운명일지도 몰랐다. 아마도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는 길이었을까. 일주일간 해준이 일본 학회에 다녀올 테니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라 말했기 때문에 그녀가 어디로 떠나든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행 연구 결과를 급히 정부 기관에 브리핑하여 연구비를 수주할 일이 생겨 해준의 일본행이 취소되었고 결국 해준의 조교가 일본 학회를 대신 참관하며 자료를 수집해 오기로 했던 것이었다. 브리핑이 싱겁게 끝났고 연구비를 쉽게 따낸 후 해준은 남은 학회 일정이라도 보려고 일본행 티켓을 다시 샀다.


해준이 묵으려던 호텔 로비에 들어가며 본건 해준의 조교와 그곳이 아닌 곳에서 여행하고 있어야 할 그녀였다. 둘이 오랜 부부처럼 다정한 웃음과 자연스러운 스킨십을 먼발치에서 보며 해준은 눈을 의심했다. 해준이 예약했던 룸이 아닌 디럭스 스위트룸 506호로 들어가는 그들 뒤에는 초현실을 겪는 듯한 해준이 얼어붙어 서있었다.


그녀에게 자주 나는 희미한 향이 파렌하이트였다는 걸 일본에서 돌아와 연구실의 조교를 스치면서 깨달았을 땐 이미 일본 그 먼 이전부터 해준의 조교와 그녀는 하나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조교의 명확한 업무처리도 눈빛도 매일 진하게 뿌리고 오는 파렌하이트도 변하지 않았다. 아침마다 만들어주는 그녀의 오믈렛도 해준의 목을 감으며 속삭이는 사랑한다는 말도 똑같았다. 다만 해준이 달아나고 있었을 뿐이었다.


오랜 동거는 해준과 그녀의 최선이었다. 그렇게 언제나 행복하다 믿었던 해준이었고 그녀도 그런 줄 알았다. 이곳으로 떠나오기 전 해준은 조교에게 마지막 전화를 했다. 언제부터인지 묻지 않았다. 그녀에게 진심인지 궁금했다. 그렇다는 대답이 수화기 너머로 떨리며 넘어왔다.


해준의 그녀는 얼마간 해준과 함께한 걸까. 십여 년 전 서로에게 약속한 진심의 유효기간이 지난 걸까. 세상을 모두 얻은 듯 해준과 그녀가 시작한 날을 잊을 수 없다. 작은 단독 주책을 사며 잔금을 치르고 그곳에 오래 살았던 할머니에게 키를 받으며 쌍둥이 자매처럼 웃음이 닮았다는 말에 얼마나 행복했던가.


해준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다. 런던행 티켓은 해준의 삶을 새로운 스테이지로 이어 줄 것이라 여겼다. 해준이 사랑했던 그녀가 더 행복하도록 그녀만의 시간과 공간을 허락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런던 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해준에게 닥친 익숙한 향에 해준이 억눌러왔던 모든 분노와 슬픔이 끓어올랐다. 그녀에게 허락이라니, 해준의 위선과 가식을 찰나 속에서 마주친 향이 드러내고 있었다.


고통을 끄집어내는 향과 생명을 품은 척 서있는 조화 화분이 가득한 이곳이 해준이 다시 일어서야 할 곳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