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적 기능장

14 뜨거운 심장은 어디에

by 서희복

인간을 사는 건 인구만큼 다양하다. 아무리 많이 만났어도 다시 만난 그때가 처음이다. 그러니 인구만큼과 만날 때만큼의 낯섦을 경험한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항상 새로운 세상으로 대면하는 것, 흥분되고 알고 싶고 미칠 것만 같은 것이다.


가장 신기한 전율은 순수를 가장한 조작적 기능성 인간들이 있다는 거다. 사회적 기능을 마스터하기 위해 치열하게 사는 그들이다. 핵심의 저 아래 미묘한 의미를 뒤로하고 기능만이 목표인 인간들이다. 융통성이란 걸 항상 염두에 둘 수 있는 사람들이 좋다. 내가 그러기를 항상 바란다.


이 인간은 결혼의 문화적 사회적 의미를 잘 아는 사람이다. 나이가 되면 결혼을 해야 한다. 10대 조혼부터 20대 30대가 좋은 시기라는 때도 있었고, 지금은 자기가 하고 싶은 때 결혼하면 된다고 한다. 공익 광고랍시고 20대 중반에 결혼하면 아이가 독립할 때쯤 부모도 자신이 원하는 세게를 새롭게 찾아가는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호소하며, 결혼 적령기라는 덫을 버젓이 공론화한다.


이 기능적 인간은 2-30대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딸, 아들 둘을 낳고, 아니면 다자녀 혜택의 늪에 빠져 다섯쯤 낳아 기르며 온 생애를 허덕거린다. 지금은 저출산시대라 낳은 아이의 머릿수만큼 현금을 떡떡 얹어주니까 평생 그럴 거라 순진하게 믿는다. 천박성에 기대면 기능에 골몰하는 삶에 치열해진다.


사랑해서, 떨어져 있기 싫어서 결혼한 거 맞니? 다섯 아이를 쑴풍 쑴풍 낳을 때 정말 여러 아이를 갖고 싶어서, 그렇지 않으면 둘이서도 셋이서도 너무 외로울 것 같아서 낳았다면 어마어마한 존경을 받을게 확실하다. 나는 대학 때 이 무섭고 더러운 사회가 아이들의 순수성을 해칠 것 같아 엄청 비혼주의자였다.


지금은 많은 것들이 사업으로 돌아섰다. 결혼도 사업, 다자녀도 사업, 거기엔 사회의 즉각적인 요구에 부응하는 기능만 있고 심장이 없다. 그 심장 한편에 마음이 살 공간은 이미 없어져 버린지 오래다. 너의 흔적을 그대로 닮은 아이를 가지고 싶어서 결혼도 아이도 있어야 하는거다. 쇼펜하우어가 여자는 종번식을 위한 것이라 독설했다. 그 목적을 이루게 해 주었으니 거룩한 목표는 기능적으로 충분히 이루어진 것이라는 인간들이 조용히 위선적 삶을 이어간다.


당신은 어쩌면 사랑 따위는 필요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확언할 수도 있다. 당신의 지금 배우자에게 조차도 그런 기능적 원리가 적용되었다면 당신은 인간이기보다 자본주의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기계 톱니바퀴의 단 하나 톱니로 사는 걸지도 모른다.


물론 당신의 배우자가 인간의 암수는 2세를 만들기 위한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기능이라고 한다면 달리 할 말은 없다.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가 천생연분이듯. 하지만 그렇게 태어난 2세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인간은 자신도 타인도 가벼이 생각하며 살아서는 안 되는 존재다. 그게 어려워 출산율도 줄고 자신의 인생에만 목매어 고독하게 사는 많은 사람들을 본다. 나는 두 심장을 합치면 신비한 기적 같은 시너지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총균쇠의 저자이며 한국의 한 대학 석좌교수인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인구의 급격한 증가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한국의 현 저출산 상황에서 찾으려 한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스스로 인지하며 출산에 대한 욕구를 줄인다는 것이다. 특강을 들으며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다. 자본주의의 폐해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확실하니 그의 이론은 앞으로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나는 인간의 순수 기능장으로서의 삶에 매우 부정적이다. 기능에 언제나 앞서야 할 것은 심장이다.


글쓰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글쓰기에 대히 본격적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한 가지 굳은 믿음은 마음을 다해 글을 써서 이 글을 타인과 나누고 싶을 때 발행하거나 출간해야 한다는 거다. 그러니 글은 다른 사람의 비판과는 독립적으로 자신을 얼마나 진심으로 바쳐 썼느냐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를 얼마나 갈망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렇게 쓴 글만이 자신과 세상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어떤 글이 나쁜 글이고 어떤 종류가 좋은 글인지 평가하고 판단하고 게다가 충고에 조언까지 서슴지 않는다. 당신이 이해 못 한다고 해서 나쁜 글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그릇만큼 이해하고 거기에서 조금 더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그 폭이 조금씩 확장된다. 교과서에서 배운 틀에서만 방황하지 않고, 사회가 강조하는 법칙에만 매달리지 않으면 세상의 많은 글들이 더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어떤 특정 맥락에서 따라야 할 기능이 있다면, 그 글을 쓰는 사람만 그걸 따르면 된다. 출간을 갈망한다면 더더욱 기능적이 될 수밖에 없다. 몇 사람이 구매할 수 있을지 추정해야 하고 예측이 어긋날 땐 출판사의 혹독한 검열과 윤색을 견디는 것, 바로 그것이 글을 쓰는 사람이 기능장으로 허겁지겁 새로 나는 길인 것이다.


타인의 글이 자신이 이해하기 쉽지 않을 때, 어디선가 배운 대로의 구조가 아닐 때 나쁜 글이라 단정한다면 그건 엄청난 오만이다. 사회적 적응의 최대 산물이 되는 것만이 가치를 인정받을만한 삶이라는 생각은 편협하며 극도의 자기중심적인 오류다. 당신의 세계에서만 그렇게 하라.


수많은 철학자나 문학의 가치와 이름을 정확하게 대지 않아도 세상의 글들은 그 글 그대로의 순수로 존재한다. 글은 빠르게 배설되는 묽은 변이 아니다. 설혹 그런 경향처럼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그들끼리는 엄청난 공감으로 서로의 글과 그 글을 쓴 이들이 진심으로 소통하는 길을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글은 먹이를 탐하며 눈치 보다가 날아 사라지는 새가 아니다. 글 한자 한 문장 사이에 오래 머무르며 글을 쓴 사람의 시간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이다.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글에서 심장을 퍼내야 한다.


내 생각은 이렇고 세상은 가차 없다.


그런 줄 안지는 오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