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산산조각
몽롱하게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는 것 같은 밤이 있다. 흐려진 정신을 그대로 따라가면 꿈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그렇게 얼마간의 비현실이고픈 시간에 문득 그녀가 나타나 내 앞에 선다.
나를 통째로 어느 차원에 맡기는 날에는 이것저것 생각할 필요는 없다. 나는 그녀를 믿었으니 그녀가 나를 위해 짜둔 꿈길의 여정에 나를 오롯이 기쁘게 묻으면 될 일이다. 나는 숫자에 대한 감각이 거의 없고 그녀는 거리에 대한 이상적인 상상력으로 풍성하다.
어둠을 뚫고 닿아야 할 그곳의 동토를 그녀가 가리킨다. 현실을 피하려는 공포에 헛웃음이 난다. 애써 목소리를 죽이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면을 쓰지만, 그건 움직이는 시작이어서 가능한 거다. 길은 낯설고 밤은 칠흑 같다. 비가 두둑거리다가 싸라기눈이 유리를 때리는 소리에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사륜구동의 커다란 광폭타이어가 좁은 길에서 곡예를 한다. 이리 밀리고 저리 미끄러지며 온몸의 털이 딱 구십 도로 뻣뻣하다. 긴장한 털들이 바늘이 되어 정신 차리라 아우성이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 바람이 보내는 숫자를 알아내려 애쓴다. 이미 숫자를 알아냈으나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노라는 고백에 이미 달려온 얼음길에 더 하얀 성에가 낀다. 저항하는 운전대에 체중까지 실어가며 울며 매달려가는 나는 그런 돌풍의 속도를 상상하지 못하고 다른 세상이 주는 거친 삶의 신호라 믿었다.
바위를 받치고 있는 시지프가 꼭대기를 앞두고 가장 고통스러운 것처럼 무의지의 비현실적인 속도는 바로 옆에 죽음의 신을 페이스메이커로 두고 달리며 무감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천국인 줄 알았던 옆자리의 괴리가 고뇌로 바뀌는 찰나가 있다. 조준하며 부는듯한 바람에 밀리는 공포를 예상하지 못한 당황의 눈물을 보는 순간 미안함과 죄책감의 늪으로 그녀가 들어가는 중이었으리라.
나는 끊임없이 달리고 있다. 흐려지는 몽롱한 정신에도 달려가고 있으며 상황이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아도 움직여야 하고 비현실의 공포가 엄습해도 이기며 나가는 것이다. 두려움도 당황도 고통도 무감각도 모두 고스란히 가슴속에 쌓아가며 동토의 끝에서 토해낼 포효를 준비하는 것이다.
누가 옆에 있든 간에 삶은 오롯이 나의 몫이라는 것, 방향키에 손을 얹은 이상 단호하게 후회 없이 지금을 살아야 한다. 손의 힘을 포기하는 순간 상상조차 버거운 다른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그때를, 그 적절한 때를 결정하는 것도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아이스링크를 지나 닿은 곳에는 세포를 꼿꼿하게 얼리는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인간을 노려보는 자연의 포효에 맞서는 것은 우매하다.
힘주어 닫힌 눈에서 나온 눈물이 얼음 알갱이로 날렸던 날, 바로 정상을 앞두고 바위를 받치고 있던 나의 등이 푸르른 멍으로 신비하다는 걸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