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토의 바람

25 쎈 그 이상의 단어가 필요한

by 서희복

북으로 북으로 바람을 몰다가 남으로 가는 길에 내다 꽂힌다. 차가운 돌에 긁힌 세포 사이로 다시 하얗게 살얼음이 낀다. 가차 없는 겨울이 좋다. 콧속이 얼음이 되는 겨울에는 서투른 짓보다 여미는 앞섶에 기운을 모은다. 질질 새어나가지 않게 웃음을 단속하고 꽁꽁 언 모서리마다 가장 빛나도록 날을 가는 계절이다.


그런 겨울을 다니고 있다. 머물러야 할 겨울을 두고 더 머물고 싶은 혹독한 겨울 속에서 마치 수련하듯 바람을 맞는다. 바람마다 흐름이 다르고 장단이 다르고 짓궂음도 다르다. 쫓아내려는 듯 위협의 소리로 호령하는 백록담의 바람,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이 찌르고 베고 달아나는 선자령의 바람은 맞선 것들 중 으뜸이었다.


돌풍을 온몸으로 맞으며 의지와는 반대로 움직이는 세상에 서있다. 차도 비켜서고 사람은 날려갈 듯한 한 순간의 바람은 지금껏 겪었던 독한 순간들을 겸허하게 내려 앉힌다. 그래서 더 단련하는 마음으로 순응한다. 그러면서 진심으로 사는 여행자가 된다.


어느 영화의 한 대사처럼, 여행객은 다니다가 마음이 머무르는 곳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사람이다. 관광객은 떠나옴과 동시에 집이 그리워, 분주하게 떠다니다 집에 돌아와 집이 최고라고 외친다. 세상을 향해 짐을 꾸리고 돌아가지 않아도 제대로 삶이 굴러가는 뜨거운 상상을 겨울의 중심에서 꽁꽁 얼리고 있다.


사람들의 입김을 더 가까이 느끼며 살 것인지 자연의 거친 심술을 용기 내어 받아들이며 살 것인지 하나씩 정리해 가며 충만해지는 시간들이 기껍다. 선으로 경계 진 구역에서 수많은 길중에서 하나를 고정하고 써야 할 말을 골라 거푸집에 넣어서 뒤집어 두드려 모양을 만들어 사각 오각 육각으로 사는 건 지루하다.


말보다 글보다 일단 내디뎌보는 시간에 익숙하다. 빠지고 실패하고 좌절하면서 배우는 것이 무엇보다 더 깊이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니 그러지 않으며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다. 가장 두려운 건 권태다. 권태는 삶이라는 길 위에 방치된 무생명의 부피다.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이라도 작고 소소한 일들에 정성을 다하면 어느새 새로운 길 중심에 서 있다. 새로운 사람이 된다. 극한의 상황에서는 기도가 쉽고 다짐이 쉽다. 다시는, 그러면서. 머물 수 있는 곳을 떠나 다시 돌아간대도 그곳은 새로운 나의 시작이 기다리는 다른 세상이라는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