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견된 충고

27 사양

by 서희복

어떤 장난끼가 돋으면 참을 수 없이 유치해진다.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발버둥을 치다가 이런저런 흔적을 남기려 끄적인다. 그만큼의 깊이가 불가능 하지만 버둥거리며 도전하는 거다. 그 정도의 발랄함이 불가능한 글이라도 우선 한번 창을 열어 말을 뱉어보는 것이다.


부조리에 대해 썼다가 읽다가 다시 읽고 지금은 골똘히 생각한다. 철학자들은 세상을 단순화로 수렴시키려는 건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흔든다. 아니, 그럴 리 없어. 그러다 다시 곰곰해져서 비정상의 옆에서 비틀거린다. 아니, 그렇다는 거잖아.


철학자들은 사유라는 이름으로 단순한 진리를 교란시킨다는 의심을 버리기 힘들다. 누구든 말로 할 수는 없어도 세포마다 밴 진리를 기어코 말로 비틀고 글로 새겨 넣어 자신의 이름을 얹어두는 것이다. 그 진리만큼은 자기가 발견한 것처럼.


하지만 정작 그 자신들은 믿고 있는 진리 밖에서 사는 것 같다. 마치 사이비 믿음을 전파시키고는 그 밖에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기 마음대로 그 이름 밖에서. 철학자들의 이론과 그들의 사적인 삶을 읽을 기회가 나면서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사유라는 건 이런 거야 하면서 정작 자신의 삶은 판단력이 흐려진 오점의 시기 때문에 역사에 논란을 남기고, 교육 이론가가 자기 자식들은 제대로 양육하지 못하고, 고통을 이겨내고 이리 살라 저리 살라 하면서 자신의 고통에 압도되어 자살하거나 정신을 놓아버리고, 자본주의 산업화의 병폐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실제 그 톱니바퀴로 사는 사람들, 그들 중 세상에 알려진 이름들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그저 이름에 이름을 얹고 확장 응용이라는 그럴싸한 활동에 권력까지 더해 어쩌면 더 강렬한 집착으로 어두운 구석을 탐하는 사람들이다.


인간이니까. 모두 일개 인간으로 수렴되니까.


부조리를 헤매다 여전히 멈춰있다. 뒤르켐이나 흄이나 까뮈나 보통까지도 결론은, 그래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살만하니 끝까지 견뎌라, 최선을 다 해라, 고통을 즐길 수도 있다는 사디스트적 충고를 한다. 흄의 자살에 대한 짧은 메모는 모호함 때문인지 비겁함 때문인지 비자살론자들의 반박 자료로 분석된다. 소설적 자살이 아니라 현실적 이성적 자살이 왜 타당하지 않은지에 대한 오직 한 가지 결론이 그래도 살아야 한다 왜? 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이런 식의 지루함에 하품이 난다.


차이, 경쟁, 열등, 속도, 비관, 자살... 시작은 차이이고 차이는 다름이고 달라서 동일화를 위해 경쟁하고 하다 하다 안 되는 열등감에 비이성적 속도에 파묻혀 대관절 해결이 안 되어 비관하다가 자살하게 되는 건, 그렇게 소소한 차이가 자살까지 가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자신 위에 올라설 수 있는 그런 '실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소멸하기 바로 전의 모습이 가장 최선의 버전이어야 한다는 것, 그런 믿음이 진짜 자신을 살게 한다는 것, 이게 대체 무슨 결론인가.


목이 아프도록 비난하던 모호한 목소리들과 다를 바 없는 길을 뻔뻔히 걷고 있는 나는 언제 대체 그런 '실체'가 될 수 있는가.

읽던 책을 중간에 던져버리지 못하는 이 불치병, 이 구토 나는 모순의 삶, 이 앞뒤가 어긋나는 자음과 모음과 구두점들의 쓰레기통, 취해야만 사는 이유들이 한가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