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엽편소설] 점도

by 서희복

천근의 무게가 저울 눈금이 아닌 날이 있다. 관절 사이의 바이러스인지 필요 없는 이물질인지 모를 어떤 증상의 결과는 국소마취였다. 정신은 말짱하고 파란 수술가운과 모자와 마스크가 가리고 남은 찢어진 작은 눈을 보자마자 산이의 몸 말짱하리라 믿은 건 오산이라는 걸 알았다.


"느껴지세요?"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물을 수 없었다. 수술용 메스가 손으로 건네지는 미세한 기척도 들을 수 있었지만 대체 무엇이 어떻게 벌어지고 잘라지고 떨어지고 붙여지고 있는지 알 길은 없었다. 그런 막막한 천근의 무게에 머릿속이 더 맑아지며 공포가 들어차고 있었다.


입을 움직일 수 있었다. 눈동자도 굴릴 수 있었고 입꼬리를 귀 쪽으로 올리는 것도 가능했다. 아 소리를 길게 내었다. 갑자기 분주한 어떤 동작들이 멈추는 듯하더니 당황한 듯 흥분한 목소리가 피냄새나는 공간에 울렸다.


"느껴지세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 분통이 났다. 산이의 몸인데 다른 세계로 양도된 나무토막 같았다. 가끔 전동 드릴소리가 났다. 어디가 갈려나가는지, 생명을 쥐고 있는 피가 다시 몸속으로 주입되는지, 어딘가에 받아 선짓국집으로 팔려 나갈지 알 수 없다는 체념이 오자 눈물이 났다.


체념의 기운을 읽었는지 갑자기 간호사가 후다닥 뛰어 나갔다. 못 볼걸 보았을까. 산이는 가슴 위 어느 부분까지는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있는 힘을 다해 꿈틀거림을 시도했다. 허사였다. 투두둑 뭔가 튀거나 떨어지거나 하는 것 같았다. 왜 머리만 살려두었는지 알 수 없었다. 급박한 울림이 머리 쪽에도 전해져 왔다. 누르는지 뽑아내는지 왜 머리가 흔들려야 하는지 알 길은 전혀 없었다.


수술대 쪽으로 걸어오는 간호사의 손에 무언가 들려있었다. 가장자리가 영롱한 붉은빛이 도는 비닐 파우치처럼 보였다. 피는 아름다웠다. 갑자기 눈앞이 불투명해지며 뒤에서 누군가 산이의 몸을 흡입기로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흥분되는 뜨거움이 희열이 되었다. 부드럽게 사라지는 중이었다.


들리세요라고 묻는 것 같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이내 눈꺼풀이 가벼웠다. 손도 가벼웠다. 깃털 같은 몸을 일으켰다. 한쪽 팔에 링거를 꽂고 다른 쪽에는 반쯤 비어진 피를 담은 봉지로부터의 튜브가 산이의 다른 쪽 팔에 꽂혀 있었다. 눈을 감고 누워있는 산이의 몸이 하얀 안개 같은 막으로 싸이고 있었다. 그 안개만큼 가벼워진 눈으로 산이는 패닉이 된 파란 가운입은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왼쪽 대퇴골이 보였다. 반쪽으로 그어진 메스의 자국을 따라 흥건하게 검붉은 액체가 끈적하게 떨어지는 것 같았다. 무릎이 아니라 고관절이었던가. 생각나지 않았다. 간호사가 다시 수술실 밖으로 서둘러 나가는 것이 보였다. 하얗게 가벼워지는 몸에서 오래 겪었던 고통들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상처가 깊어 보이는 골반쪽으로 몸을 기울여도 아프지 않았다. 아, 이런 가뿐한 행복을 느껴본지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조금씩 비워가는 거다.


산이의 몸 부위마다 세포마다 새로운 안개들로 가득 차고 있었다. 분주하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너저분하게 벌어져있던 산이의 오른쪽 다리를 정교하게 꿰매기 시작했다. 희망인 건가. 심박수를 알리는 기계음이 하나의 톤으로 일정해지자 산이는 그제야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가운을 입고 침통한 사람들을 돌며 손을 다독여 주었다.


'느껴지나요?'


아무도 산이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무도 산이에게 무엇을 느껴야 하는 건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래, 산이도 그랬었으니까.


가벼운 자와 무거운 자들의 경계에는 잃음으로써 얻는 자유에 대한 이야기와 또 다른 잃음으로도 굳게 살아야만 하는 분주함이 공존한다.


산이는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