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무극은 비극인가
뭐든 두 개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럴 수 없다. 이론은 그럴 듯 하지만 실제는 불가능하다. 선과 악도, 담는 것과 쏟는 것도, 사랑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도, 정확하게 여기까지가 그거고 저기까지가 이거라고 말하지 못한다.
상대를 지배하려는 궤변으로 현혹시키는 말이다.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그 이상을 살지 못한다. 치유한다는 핑계로 병든 자들을 기만하며 사는 수도자의 목적은 무엇인가. 신을 위한 소명이라고 하면서 위약 효과를 팔아 자신의 명예와 공동체에 기여한다고 믿는다.
이분법을 좋아할수록 모호한 삶의 현상을 반듯한 틀에 넣으려는 경직된 상태가 된다. 많은 철학자들의 같은 언어에 대한 다른 정의들이 또한 그렇다. 어떻다 저떻다 하지만 이거다 저거다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세상이던가. 불안을 잠재우려는 현란한 언어를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다.
우울도 죽음도 철학으로 견뎌낼 수 있다고 하는 어느 우울한 철학자의 글을 읽으며 과연 항상 견뎌내라고 충고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에너지가 없고 욕구가 없고 삶에 대한 어떤 이유도 없다면 스스로 갈 수 있는 극한까지 닿아서 깨달아야 하는 건 아닐까.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알 때까지 자신의 생에 대한 시도들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그 시도의 끝에 원하는 길이 보일 것이다.
부조리 인간에 대한 찬사와 결국 다 그런 거라는 몰아세움의 기운이 만연하다. 지식을 쌓으면서 정보를 모으면서 경쟁으로 떠밀면서 다 까발리라고 속삭이면서, 인간은 그러면서 살아내는 거라 부추긴다. 지식과 정보와 경쟁과 천박한 투명성의 삶이 그러니 알아서들 잘 견뎌내라는 거다. 많이 배웠다는 속물들이 자신을 전시하며 세치 혀로 살아가는 방식이다.
억압 없이 진실한 자신으로 살아가는 길에 대해 생각한다. 하고자 하는 것들이 비교의 결과로 도드라지지 않고 가슴이 향하는 방향으로 절실한 만큼 살 수 있다. 타인이 부러워서 자신의 삶이 형편없다고 생각한다면 이미 사회적으로 눈치 보는 삶, 지금을 억압하며 구차해지는 것이다.
해야만 하는 것들에 대한 경이 위에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한 소망이 제대로 자랄 수 있다. 속된 옛말에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데 이보다 더 가여운 삶은 없을 것이다. 개처럼 버는 동안 현재는 단지 미래에 정승처럼 보내기 위한 수단이 된다. 지금을 희생하는 미래는 충만하게 채워질 수 없으며 현재의 귀한 시간들이 회한과 공허로 남을 것이다.
사회구성원이 현재를 잘 살기 위해서는 수평 수직적인 관계 내외적인, 정서적 지지와 책임이 필요하다. 사회시스템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공동체에 대한 기여와 기대가 생기게 된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개개인을 건전하게 성장시키는 건 규율이 아니라 자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