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더 막살아야지
작은 부피 곳곳에 좌표를 찍혀가며 방사능에 피폭된다. CT촬영 가기 전 다녀온 후 삶이 변하는 건 당연하다. 증폭되는 불안의 가격을 흥정하고 정가로 지불한다. 자본주의 AI 사회에서 보이는 걸 확인하는 건 정밀한 기계가, 결과를 판독하는 건 기계가 뒤집어 보여준 좌표 근처만큼의 평균치를 벗어난 어떤 수치를 다시 기계가 읽어낸다. 기록된 예후를 전문가가 내 눈을 5초 정도 보면서 알려준다. 아직은 크게 나쁘지 않아요. 수납 완료.
큰 이상은 없어요라든가 엄청나게 좋은 상태는 아니에요라든가 3개월 또는 6개월 후에 봅시다 같은 말은 없다. 그런 증상이 있으면 진통제를 드세요. 통증을 이겨내는 방법은 많다. 파우더도 있고 액체도 있고 알약도 다양한 크기에 색깔도 여러 개다. 무엇을 골라 먹어도 뿌옇게 먹먹한 무딤이 오기 전 물리적인 삶은 우선 멈춤이다. 그때 뇌와 심장과 그 어느 구석에 박혀있을 마음을 일으켜서 스스로 예후를 조정한다.
그 저녁 오렌지 주스에 보드카를 섞었다. 내가 정한 만큼 신나게 잘살았다. 이제는 조금은 더 방탕하게 살아도 된다. 그래서 타협한다. 사람들 사이에도 증상들 사이에도 즐기고 싶은 쾌락의 도수를 정할 때도 이성의 잣대로 액셀과 브레이크를 달아두는 것이다. 나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 조금 더 막살아도 세상은 돌아간다. 통증과 고독은 꼬리를 잘라 안에 차곡차곡 쌓아, 마구 사는 그 사이에 스스로 낙천의 울타리에 가둔다. 가두고 나니 자유가 되는 건 아이러니다. 중독의 전조를 잘라내고 자신을 책임지는 그런 흐들흐들한 자유가 좋다.
약물이 흘러 들어가는 투명한 통로를 채운다. 팔목 근처에 굵다란 바늘을 직각으로 세우며 조금 따끔할 거라며 말하는 동시에 벌써 묵직한 통증은 지나간 후다. 이런 전략 좋다. 통증의 시간차를 두 눈으로 똑바로 목격하는 것은 내 취미 중 하나다. 묵직하게 달린 기구 무게만큼의 통증, 검붉은 피가 튜브를 통해 빠져나올 때 이상한 쾌감, 뜨거운 공격을 받는 듯한 폭발적인 몸통의 반응은 모두 내가 살아온 솔직한 궤적이다.
어떤 고통은 참을 수 없다. 정상 입니다라는 비정상의 진단, 실제의 통증과 진단된 통증이 다르면 스스로의 삶을 직관대로 개척하면 된다.
나는 오늘도 이 많은 흔적들과 이별한다. 하지만 어떤 시간은 계속 되돌아온다. 이월된 이별을 되감으며 혼자 애틋하다. 그래서 취하는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