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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 양극의 분노

[영화] 아들들(Sons) by 구스타브 몰러 감독

by 서희복

어떤 이들은 이 영화를 시국에 맞춰 개봉한 공권력 남용에 대한 보고서라고 이야기한다. 보이는 것들의 조합은 그럴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심리는 훨씬 더 복잡하다. 그 힘의 남용은 아주 오래 묵은 분노와 동정,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양가적 감정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특히 간수가 아닌 어머니라는 입장에서 그렇다.


영어로 번역된 제목이 '아들들, Sons'이라서 더 그렇다.


두 어머니의 겉과 속의 이면이 그대로 드러나며 아이들의 무의식에 폭력이 되어 잠자는 그 통제할 수 없는 악에 받친 목소리의 원인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아이들은 왜 그렇게 자라는 걸까. 아들러는 아이들이 나쁘게 자라는 원인을 유전자에서 찾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원래 가지고 태어난 것보다 환경의 영향으로 가장 많이 변화한다. 그 환경이 시작이다.


어두운 두 엄마의 모습을 본다. 두려움과 죄책감의 어미들을 본다.


깔끔한 집, 아이가 하는 것마다 강압적인 명령으로 제어하려고 한다. 그런 양육 방식으로 자란 엄마, 사회적으로 고분고분 부모나 선생의 말을 잘 듣는 모범생으로 자란 사람일 것이다. 책 읽어야지, 공부해야지, 학교 가야지, 싸우지 말아야지, 어른을 공경해야지...


그녀의 무의식에 쌓여가는 분노를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하고픈 말이 있어도 웃어야 하는 사회적 압력을 눌러가며 아이에게도 같은 방식을 고수할 것이다. 슬픔의 시작이다. 아이가 전혀 다른 세상이라는 것을 자신의 몸을 통해 아이가 빠져나오는 그 순간 인정했어야 하는 것이다.


아이의 분노가 커지고 몸도 커지고 생각도 커진다.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받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하는 다소의 일탈과 감정들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엄마는 이렇게 살았는데 넌 대체 왜! 커질수록 통제되지 않는 아이. 차라리 없어졌으면!


사고 치고 갇힌 아이를 보며 안도한다. 너무 기뻐하면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니 잘 돌보는 척하며 갇힌 아이를 찾아간다. 사실은 공포면서. 다시 엄마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까 봐 두려우면서 말이다. 내 구역에 오는 범죄자 아들은 싫다. 필요할 때만 내가 갈 수 있으니 안도다. 생일 축하해!


아이야, 네가 갇혀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 엄마에게 온 이런 자유가 기뻐. 내색은 못하지만 자신의 삶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건 정말 기쁨일까. 자신의 폭력성을 깨닫게 되면서 어미로서의 덕목과 서로 충돌하며 자아는 분열하기 시작한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나.


지독히도 경멸하던 내 자식, 그를 해롭게 한 그녀의 자식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그녀는 공포의 눈물을 바닥에 떨구지도 못한다.


그 경멸은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다.


그 분노는 자신의 삶에 벌컥 오물을 쏟은 것 같은 자기 아들에게 퍼부은 것이다.


타인의 아이에게 자비와 폭력을 교차하며 점점 자신의 아들에게서 흐르는 가여운 눈물을 본다.


제대로 배우지 못해 거칠게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눈앞에 서 있는 타인의 한 아들과, 제대로 돌봐지지 않은 채 세상에서 휘발된 자신의 아들이 하나가 되는 순간, 그렇게 좌절과 포기, 수용하는 뒷모습은 다름 아닌 화해다. 자기 자신과 그 아들들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부모가 된다는 건, 세상 하나를 새롭게 다시 만드는 것이다. 엄마의 자궁을 나서자마자 첫울음이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제대로 맞아야 할 환경이어야 한다. 진심의 정서적인 눈 맞춤이 그 시작이어야 한다.


첫울음은 간절한 호소다. 엄마, 저 여기 있어요.



포스터 by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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