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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금요일 Feb 09. 2019

물건에 관하여 - 7

일요일의 축구공


일요일 아침 9시부터 11시 반까지는 남편의 조기축구 타임이다. 새벽부터 일어나 축구 동영상으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할 때도 있고, 다른 멤버들보다 조금 더 일찍 나가 몸을 풀 때도 있다. 잘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참 열심히는 한다. 우리는 둘 다 심야형 인간이므로 늦게 잠드는 날도 많은데, 잠들게 되는 시간이 새벽 두시가 넘어가면 차라리 밤을 새버리는 쪽을 택한다. 혹시라도 조기축구에 결석을 할까봐서 말이다.
한동안 생업에 지쳐 조기축구에 나가지 못할 때도 있긴 했는데, 남자는 어떻게 불행하게 늙어 가는지를 다룬 일상 다큐멘터리를 보는 줄 알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들어 가다가 다시 공을 차러 나갔을 때 그는 회춘하였다. 물론 마음이 그랬다는 거다.
반면 나의 관심은 축구를 끝낸 그가 식사 시간에 늦지 않게 해장국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데에 있다. 일요일 식사는 가족과 함께! 이런 무적의 캐치프레이즈 덕분에 그는 축구가 끝나자마자 분주하게 움직여 귀가한다. 해장국과 함께. 나는 애써 그의 조기축구회에 관심을 두려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가 목구멍에 피 냄새가 차오를 때까지 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쯤은 안다. 그래도 그걸 실제로 본적은 없다. 그러려면 일요일의 늦잠을 포기해야 하는데, 안 될 일이다. 언젠가 남편은 하루에 두 게임을 뛰는 다른 멤버들 이야기를 슬쩍 꺼낸 적이 있다. 일요일은 물론이고 토요일부터 공을 차는 멤버들 이야기도 덧붙였던 것 같다. 나는 짐짓 못들은 척하였다. 남편은 며칠 그들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다가 이내 더 이상은 부러움을 표내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번 생에는 글렀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내가 2018년에 가장 열심히 한 일 중 하나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본 거다. 여러 번 보았고, 볼 때마다 캐릭터의 사연들을 다양하게 엿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그리고 또 하나, 조기축구! 주인공 박동훈의 제1 소속은 후계동 조기축구회다. 중년의 남자와 조기축구회에 대해서 조금은 마음을 열 수 있게 된 게 박동훈 아저씨 때문이다. <나의 아저씨>의 후계동 사람들은 생의 대부분을 함께한 동네친구들이다. 그들은 축구로 아침을 시작하여 밤은 술로 마무리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형제이고, 형제들의 형제들인 셈이다.



그에 비하자면, 남편의 축구팀은, 드라마 속 조기 축구회 구성원에 비해 국적도 다양하고 사는 곳도 제각각이다. 드라마에 비할 수 없이 현실은 훨씬 불균질하다. 함께 있으면 두려울 게 없는(바로 그것 때문에 아내들은 그들이 함께 있는 게 징글징글한) 이들로 구성된 그 무리는, 일요일 아침의 시큰한 땀 냄새 외에는 별다른 균질성이 없다. 나는 드라마보다 복잡한 현실의 이 조합이 참으로 신기하다. 사람을 가리는 기준이 없고, 친교의 벽이 없으며, 일상의 공유와 분리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들 사이에 감정적 얽힘까지야 없지 않을 테다. 공을 차는 남자들도 싸우고 삐지고 씩씩댄다. 그러다가 뜨거운 화해의 포옹 따위 생략하고 다음 주에 다시 모여 또 찬다. 일단 ‘공을 찬다’는 기준선만 넘으면 그냥 ‘공차는 친구들’이 되는 거다. 그래서 생각건대, 조기축구회 구성의 균질과 불균질에 대해서 논하는 건 그저 입의 일일 뿐이다. 발의 일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나이와 인종과 직업을 초월하여 내가 찬 공을 그가 받을 수만 있으면 한데 엉켜 시큰한 땀 냄새를 기꺼이 공유한다. 그들 사이에 뜨거운 공기가 흐르고, 그 공기를 그들의 발이 가르고 또 가른다. 치열하고 둥근, 그리고 땀 냄새 나는 그 시큰한 근육질 우정에 문득 찬사의 꽃을 보내고 싶어졌다. 물론 나의 꽃 배달을 남편은 몰랐으면 좋겠다.



하기야 나의 심경이 어떠하든 그는 끝내 가고야 말 것이다. 모든 언어를 무력화하는 몸의 세계, 모든 종류의 에너지를 뒤섞어 각자의 현실을 절묘하게 패스해버리는 세계, 현실의 룰과 자신들만의 룰을 때로는 거칠게 관통시키고 때로는 유연하게 조율하며 한시적으로 열었다 닫는 미완성의 주1회 공화국으로. ‘대한민국 아저씨 문화’의 결정체로 종종 우스갯소리의 소재가 되곤 하는 뒷이야기쯤이야 가볍게 패스해버리고 말이다.
p.s.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각이 토요일 밤 11시다. 한 시간 뒤면 일요일이다. 이미 그는 꿈에서라도 축구공을 차면서 자기의 공화국으로 서둘러 입국했을  것이다. 나올 때는 해장국을 들고 무겁게 퇴장할 테지. 지난주에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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