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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금요일 Feb 08. 2019

물건에 관하여 - 6

곰인형과 로맨스



나는 인형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감성을 갖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곧잘 노모 탓을 한다.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군인이었던 아버지는 말랑말랑한 것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를 테면, 만화나 꽃이나 인형 같은 것들을 말이다.


그는 일분일초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이 정확한 남자였다. 집에 들어오면서 신발을 벗어두면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나란히 벗어져 있었다. 칼날 같은 주름이 잡힌 정장 바지를 좋아했고,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아침 6시면 일어났고, 11시면 티비를 끄고 잠을 잤다. 아주 가끔 국가 대항 축구경기 같은 것을 할 때면 예외이긴 했으나 그런 예외도 흔치 않은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몇 번인가 곰 인형을 사달라고 조르다가 그만두었던 기억이 있다. 곰 인형이 집으로 들어오지 못할 첫 번째 이유는 어린 아이들이나 가지고 노는 것이라는 거였다. 어린아이였을 때는 먼지가 너무 많고 세탁이 어렵다는 이유로 금지 품목이었는데, 어린아이 시절을 벗어나니 어릴 때나 필요한 물건이 돼 버린 것이다.


나는 그것을 몰래 방안에 둘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방이 무슨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것도 아니고, 날마다 침대 밑에 숨겨두기나 하려고 곰 인형을 집에 들일 미련퉁이는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아마 나 역시 그런 게 그렇게 절박하게 필요하지 않은 부류의 사람이었겠지.



돌아가시기 전 투병 생활을 하느라 침대에 누워 지내시던 2년을 제외하고는 자기 생에서 단 한 번도 흐트러짐이 없었던 아버지를 나는 존경했다. 존경했고, 사랑했다. 그렇지만 존경하고 사랑하는 가족에게도 아쉬움은 있는 것이어서, 그가 곰 인형을 좋아하는 그런 남자였으면 어땠을까,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나에게는 곰 인형의 이미지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지금 말한 대로 내게는 허락되지 않은 곰 인형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파리에서 스쳐지나간 곰 인형이다.


파리의 콩코드 광장에서 신호대기를 하고 있던 때였다. 가을이었고, 햇살이 유난히 좋은 시기에 떠난 여행이었으므로 마음에는 온통 여유와 느긋함 같은 게 뭉글뭉글했다. 우연히 만나는 모든 것에 감탄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어느 한 순간 웃지 않는 때가 없었다. 당시에 찍은 사진을 열어보니 정말 모든 컷마다 나는 다른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곰 인형을 만났다. 오래된 컨버터블 자동차를 운전하는 백발의 신사가 뒷좌석에 커다란 곰 인형과 장미꽃 한 송이를 싣고 달리고 있었던 거다.

우와~!

감탄사를 내뱉고 자동차의 뒤꽁무니에 나의 시선을 매달아 한참을 바라보았다. 아마 길어야 10초쯤 됐을런가 싶다. 그런데 나는 그 10초의 기억을 여행에서 돌아오고 해가 바뀌었는데도 아직도 갖고 있는 거다. 나는 그날 밤 숙소에 돌아가서 한참 곰돌이 인형을 떠올렸다. 곰돌이 곁에 있던 빨간 장미 한 송이도.


누구에게 하는 선물일까.


머리 모양새로 보아선 곰 인형에 폭 안길 예쁜 손녀가 있을 법한 나이였지만, 나는 그 선물을 차지할 주인공 후보 목록에서 손녀를 가장 아래에 두었다. 손녀에게 줄 선물이라면 빨간색 장미꽃 한 송이는 불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손녀에게 주기에는 너무 꽃이 너무 모자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내? 그럴 수도 있겠지. 한국의 정서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로맨스를 아는 프랑스 남자라면 아내에게 장미 한 송이와 귀여운 곰 인형을 선물을 할 수도 있기야 하겠지. 그래도, 에이, 설마...! 아내보다는 애인이겠지! 애인이어야 해. 애인! 나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에 그 백발 노신사의 예쁜 애인을 떠올려보았다. 아내보다는 이미지가 훨씬 더 잘 그려졌다. 그 편이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프랑스 남자가 할 법한 연애에 썩 잘 어울렸다. 장미 한 송이는 세계 어느 곳에서라도 연인에게 줄 법한 선물이다. 한 다발이 아니라 한 송이라는 것에 자꾸만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아무튼 그날 밤 나의 공상 속에서 백발의 그는 아름다운 연인에게 곰 인형과 장미 한 송이를 선물하고, 향이 끝내주는 와인을 마셨으며 뜨거운 연애의 눈빛으로 자기의 예쁜 여자 친구에게 달콤한 키스를 건넸다.



문득 나의 인생뿐만 아니라 자기의 생에도 곰 인형 따위를 금지하고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일었다. 나는 군대가 우리사회에 이식한 대부분의 문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것이 우리 사회를 로맨스 불모지로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자기 삶의  로맨스와 낭만을 실현하는 일보다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서도 질서와 규칙을 세우고 유지하는 일에 평생을 썼다. 그는 돌아가시기 전에는 가까운 이들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었는데, 간호를 하던 엄마에게 자꾸만 당신의 아내를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저기 우리 집사람 좀 오라고 해주세요.”
“내가 당신 집사람이잖아요. 나 여기 있어요.”
“아니, 닮긴 했는데, 우리 집사람은 더 젊고 예쁜데.”
“이제 우리가 늙었지. 당신도 늙었고, 나도 늙었고.”

아버지는 한참 동안 엄마를 들여다보았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엄마를 들여다보았을 아버지의 눈동자를 떠올려 보았다. 죽음이 드리워진 눈동자. 한줌의 빛을 포위한 어둠으로 가득 찬 눈동자. 텅 비어버린 눈동자를 갖게 된 아버지는 아마 자기 생애를 통틀어 가장 뜨겁게 애정을 고백을 했을 것이다. 그는 말이 없는 남자였다. 하루 스물 네 시간 중에 일곱 시간을 자는 데 썼고,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은 침묵으로 보냈다. 그런데도, 그런 남자에게도 자기의 아내가 얼마나 예쁜 여자인지에 대한 찬사가 들어있었다. 그의 로맨스에는 당연히 곰 인형이나 빨간 장미 따위는 없었는데, 그게 비단 나의 아버지만 그런 것은 아닐 터이다.


나는, 아버지의 다음 생애가 곰 인형이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 시절이었으면 좋겠다. 군인다움이나 남자다움의 여러 기준들이 그를 강제하지 않는 그런 사회였으면 좋겠다. 그 시절에 만날 예쁜 애인이 어쩌면 엄마일 수도 있겠지. 엄마의 의견을 묻지 않았으므로 가능성은 조금만 열어두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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