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안 나
“오빠, 우리가 디즈니랜드 갔던 게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이었던가?”
나름 기억력이 좋다고 생각했었다. 공부 머리는 별로일지 몰라도 일상생활에서의 기억만큼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좋은 편이라고 자부했었다. 동시에 그런 기억력 말고 공부 잘하는 머리나 좋았다면 좋을 것을, 이라며 자조적인 생각도 했는데 요즘에는 그게 또 아쉽다.
얼마 전 갑자기 몇 년 전에 갔었던 여행을 이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이 었나 그 후였나 기억이 나지 않아 당황했던 적이 있다. 그런 일들을 겪게 되면 우울해진다.
“기억력이 점점 나빠지는 것 같아.”
시무룩하게 이야기하면 기억할 것들이 많아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착한 남편이 옆에 있어 그래도 다행이다.
계속해서 시간은 흘러가고 나이가 들어간다. 내가 서른 살이 될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계속 마냥 어린 채로 남아 있는 줄로만 알았다. 만약 서른 살이 된다면 더 어른이 되어 있을 줄로만 알았었다. 그런데 막상 서른이라는 나이가, 더 이상은 어리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나이가 되고 나니 역시 나는 어른이 되기는 글렀나 보구나 싶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더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닌가 보다.
나이만큼 어른이 되기보다는 나이를 먹은 만큼 더 많은 기억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한 살 한 살 먹은 나이만큼 기억들이 켜켜이 쌓여간다. 모래알 같이 크고 작은 기억들이 흩날리기도 하고 씻겨 내려가기도 하며, 결국은 다른 기억들이 더해져 더 높이 높이 쌓여간다. 어떤 기억들은 더 단단하게 자리하고 어떤 기억들은 저 깊은 곳에 묻혀 보이지도 않는다. 어떤 기억을 어디에 둘 수 있는지 결정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오래된 기억들 위로 새로운 기억들이 자꾸만 쌓여간다. 잊고 싶지 않은, 간직하고 싶은 기억들이 자꾸만 묻혀가는 것이 아쉽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잊고 싶지 않은 어떤 기억이 잊히고 있을 것이다.
엄마는 2년 전, 2019년 6월 20일에 세상을 떠났다. 무려 7년간이나 암으로 고생했던 우리 엄마. 나는 참을성 좋은 우리 엄마라면 어떤 힘든 치료들을 다 견디고 당연히 암쯤이야 훌훌 털고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었다. 실력 있다고 자부하는 한의사인 아빠가 한의원을 닫고 엄마를 치료하는 데에만 전념하니까 암 따위가 뭐라고, 그 아무리 무서운 병이라고 해도 당연히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뿐만 아니라 엄마 그리고 우리 가족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엄마의 죽음은 전혀 와닿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엄마의 상황에 대해 외면하고 있었다.
엄마가 앓고 있는 암이 투명 세포 암이라는 이름도 생소한 그런 지독한 암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엄마 본인조차도 몰랐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아빠 혼자서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엄마가 뼈 밖에 남지 않을 만큼 살이 빠지고 섬망 증상과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도저히 병원에 입원해있지 않는 것이 불가능해진 뒤에야 아빠는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오로지 홀로 그 슬픈 진실을 짊어지고 엄마를 보살폈을 아빠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미리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아 엄마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잘해줄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가 나고 원망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엄마는 암에 걸리고 난 뒤부터는 사진 찍는 것을 싫어했다. 항암 치료 후 머리카락이 빠진 모습이나 살이 빠져 야윈 모습, 아픈 병자의 모습으로 사진으로 남기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아프지 않은 건강하고 예쁜 모습으로 사진을 찍을 것이라고 했다. 오죽하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에게는 끝까지 엄마가 아프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이제 암 다 나았습니다라고 병원에서 얘기하면 그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한테 자랑하듯 이야기할 거야. ‘엄마, 아부지, 나 암이었는데 이제 다 나았다’라고 하면서 알려주면 돼.”
엄마가 홀가분하게 털어놓으리라 생각했던 그 사실은 결국 내가 갖은 원망을 들으며 전해야 했다.
사람들도 잘 만나지 않고 아빠와 둘이서 공기 좋은 곳으로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다니곤 했다. 길게는 2주가 넘는 긴 기간 동안 한국에 없을 때도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풍요롭고 행복한 은퇴 후 부부의 삶을 사는 듯 보였다. 엄마도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얼굴도 더 좋아지는 듯 보였고 기분도, 컨디션도 좋아 보였다. 그렇게 엄마가 점점 나아지고만 있는 줄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엄마와 함께 할 모든 것들을 다 나중으로 미뤘다.
엄마와의 여행도 엄마와 찍는 사진도 엄마가 다 나으면 그때 다 하자고 그렇게 기약 없이 미루기만 했었다.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라는 후회가 끝도 없이 밀려 나온다. 하지만 미리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들 후회가 없는 것은 불가능해을 것이다. 알고 있다. 어떻게 했었더라도 후회가 남았을 것이다. 그래도 아쉬운 것은 엄마의 흔적을 더 남겨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엄마랑 사진이라도 한 장 더 찍어 놓을 걸, 엄마한테 편지 한 통이라도 더 받아 놓을 걸, 엄마와 통화라도 녹음해 놓을 걸. 기억만으로 엄마를 추억 하기에는 내 기억이 너무나 불완전하다. 아무리 완벽하게 기억하고 새겨 놓으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모든 것들이 점점 흐릿해져 간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엄마가 돌아가신 지 몇 년이 지났던가 헷갈렸었다. 아직 엄마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다른 부분들도 그렇다.
음식을 먹다가도 이거 엄마가 맛있어했던 건데, 영화를 보다가도 이거 엄마가 좋아했던 영화였는데 같은 사실들은 기억이 나는데 그 음식을 먹으며 했던 이야기 내용이나 그 영화를 보며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부분처럼, 이러한 기억이 나지 않는 세세한 부분들이 자꾸만 늘어만 간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그럴 것이다. 그 당연한 사실이 너무 슬프다. 그래서 이렇게 기록을 남긴다. 조금이라도 더 엄마에 대한 기억이 완전할 때인 지금, 엄마에 대한 이야기들을 써 놓으려고 한다.
엄마를 떠올리다 보면 사무치게 보고 싶고 그 그리움이 못 견디게 커져 눈물이 터져 나올 때도 있다. 어느 날은 엄마 생각에 울적해 있는 내게 남편이 물었다.
“언제쯤 장모님에 대한 기억이 나지 않아서 슬퍼하지 않게 될까?”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엄마에 대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생각만으로 숨이 턱 막혀서 아무 생각도,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말을 뱉은 남편에게 느끼는 배신감과 분노로 심장이 찢어지는 듯했다. 물론 그 말을 한 의도가 무엇인지는 안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 내가 슬퍼하는 것이 속상했기에 내가 행복하기만 하길 바라며 한 말이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엄마를 절대 잊고 싶은 것이 아니다.
엄마를 추억하며 슬픔이 따라오는 것은 맞다. 행복함과 그리움, 따스함과 아쉬움 그 모든 것들이 복잡하게 얽힌 그런 감정을 느낀다. 나는 엄마를 계속해서 떠올릴 것이고 추억할 것이다. 그로 인해 느끼는 슬픔 정도야 괜찮다. 그 정도쯤이야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그러니 더 이상 엄마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지 않을 수 있도록, 그 기억들을 최대한 붙잡아 두고 싶다.
계속해서 추억할 수 있도록 기억 속에는 부디 오래오래 남아 있어 줘,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