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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icial Kes Aug 16. 2021

세상은 그냥 그대로 흘러가는데 나혼자 앓는거였던

인생 페이즈 1 종료

 합격, 참 나랑은 거리가 먼 단어였다. 시험에서는 높은 점수를 맞는 것 면접에서는 누구에게 마음에 든다는 것이 나에겐 참 어려운 일이었다. 처음 합격이란 단어를 알게 된 대학 이후 다시 취업 준비에서 합격을 얻기까지 꼬박 2년이 걸렸다. 남들처럼 큰 회사에 가는 것은 아니지만 일할 곳이 생겼다는 안도감은 또 다른 세상이 열린 것 같았다. 이제 면접 볼 곳을 다 마무리 짓고 내가 생각한 일정이 다 마무리되었을 때 내가 한 것은 산책이었다. 뜨거운 여름밤, 사실 매번 도서관 에어컨 바람 속에서 더운 것을 모르고 살았는데 이 살짝 데워진 공기가 오히려 좋게 느껴졌다. 또 하나 좋기도 하면서 내가 놀랐던 것은 동네의 평온함. 그날따라 왜 이리 평온하게 느껴지던지. 한동안 불안한 게 익숙해져 있었는데 이 평온함이 낯설게 느껴졌다. 사실 늘 똑같은 동네 풍경이었을 텐데 아파트, 나무, 사람들, 반려견들까지. 세상은 그냥 그대로 흘러가는데 나 혼자 앓는 거였던. 단순히 슬프다고 말하긴엔 복잡한 마음이었다.


 정말 긴 여정이었다. 2년이란 긴 기간 동안 준비를 하기보다는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 몰라서 한참이나 헤맨 시간이 길었다. 앞으로 긴 시간을 내 직업과 함께 해야 할 텐데 단순하게 공무직, 사기업 그리고 여러 개의 직무들 속에서 스스로 그리고  빠르게 정답 내려야 했지만 나는 취업 세계의 부진아였다. 이력서도 자기소개서도 면접도 뭐 하나 남의 마음에 들지 못했다. 남들이 하는 취업 스터디, 취업 강의, 실무자 멘토링 안 해본 게 없지만 이상하리 만큼 명확해지는 건 없고 이게 맞나 하는 물음표만 늘어갔다.


 

 그렇다고 졸업 후 이제 와서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시간은 없었다. 업을 찾는 것은 때가 되면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아서 거대한 물살에 휩쓸리듯 듯 취업 시장이란 대양에 빠져버렸다. 수영 일절 할 줄 모르는 내가 물에 빠진 건 둘 째치고 문제는 눈앞의 큰 파도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르면 하나하나 부딪치면서 배운다고 그런 던데 한 번 부딪칠 때마다 한 번도 빠짐없이 얼마나 아프던지... 하나하나 통증을 직접 느껴가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 과정 속에서 경험이 쌓인다기보다는 탈락의 경험 거듭될수록 탈락만 익숙해졌다. 덤으로 탈락이 익숙해질수록 통증이 무뎌지긴 커녕 너무 아파서 정신과 육체 모두 피폐해져 갔다. 솔직히 경험이 쌓였을 텐데 체감하기 어려웠고 현실의 벽 앞에서 '어쩌지'만 속으로 조용히 읊조리는 일이 잦아졌다. 이도 저도 안되다 보니 답이 '애초에 안 되는 거구나'로 결론지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참 떨어지고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붙은 회사도 마다 했던 2020년 겨울에는 난 다 내려놓았다. 포기했었다. 그러다 보니 참 우습게도 다 포기하니까 내 마음대로 해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어차피 안 되는 거 그냥 내 마음대로 해보자는 생각이었고 그래도 안되면 그냥 때려치우자는 합리적인 계산을 했다. 해볼만큼 해봤는데 안돼!라는 나름 남에게 떳떳한 변명거리를 만드는 것 같기도 했다. 어찌 되었던 회사에 대한 관심을 어필한다는 이유로 가고 싶은 기업에 이력서 대신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두 회사들이 본인 회사에 오고 싶은 이유를 물어대니까 니들 말대로 한 번 해줄게라는 결론이기도 했다. (근데 무슨 회사를 한 군데 쓰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도 돈 벌러 오는 걸 알 텐데 굳이 그럴싸한 거짓말을 하기를 원하는 게 정말 이해가 안 됐다.)  


 

 처음 쓴 글이 와이즐리라는 회사였고 좋은 피드백을 들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첫 술에 배부르랴라는 말이 있지만 나는 이 전에 너무 많은 첫 술을 마셨다. 이 것을 발판 삼아 여러 군데 면접을 다시 보았지만 또 탈락이 이어지자 위안으로 느껴지던 좋은 피드백은 미사여구가 곁들여진 탈락 메시지에 불과했다. 이땐 정말 마음이 아픈 사람처럼 약해져 있었다. 물론 육체적으로도 다리를 잘 못 가누는 어린아이처럼 픽하고 쓰러질 정도로 지쳤고 내심 누군가 달래주길 바라며 속으로 울었다. 하긴 너무 많이 잃었기에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나간 시간과 잃어버린 사람들과의 기억이 2020년 겨울을 가득히 채웠다. 솔직히 마냥 즐겁지는 않았던 대학 생활, 중고등학교 시절까지 아름답게 보이고 다른 친구 혹은 동기들의 취업 소식은 날 절망케 했다. 


 더더욱 최악인 것은 나를 무시하는 면접관, 관심 없는데 왜 부르는지는 모르겠는 면접관, 내 이력서 한 줄 안 읽어보고 당일에 읽어보며 면접 보는 면접관, 내 PT가 길다고 투정 부리는 면접관, 라떼를 시전 하는 면접관, 자기 이야기만 하는 면접관, 사기꾼같이 신생 회사인데 회사 자랑 늘어놓는 면접관, 당신 꼭 뽑을 거예요 하고 연락 없는 면접관 등! 솔직히 이 사람이 날 평가할 능력이 있는 건가 싶은 사람들을 앞으로도 계속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이후에도 계속 만났고 거짓말에 능하지 못하는 나는 그들의 눈밖에 나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항상 마지막 질문은 왜 나를 불렀는지 물어보곤 했는데 이 질문 하나로 회사 판단하기가 쉬워졌다.


 내년이 오지 않길 바라며 뜬 눈으로 버텼지만 2021년 올해가 밝았고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공기업에 도전했다. 그냥 사기업이 안되니까 남은 선택지가 하나라고 생각했다. 컴활을 따고 한국사를 따고 경영학을 1 회독했을 때쯤 내가 시험에 도전이나 해보려면 1~2년은 잡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하기엔 현재의 내가 너무 초라했다. 매일같이 도서관으로 출근해 학생 신분 이후에도 다시 책상에 앉아 미래의 행복한 나를 기약하며 자리를 지키는 일이 버거웠다. 지금도 행복하지 않은데 미래의 행복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빠른 판단을 했다. 부모님께 그날 공부를 그만하겠다고 말씀드리고 걱정과 우려가 크게 담긴 한 소리들을 맞수를 두었던 평소와 달리 묵묵히 들었다. 딱히 이젠 할 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 날의 나는 나 조차도 놀라게 했다. 내가 변했다는 걸 느꼈다.


  

 또다시 원점, 사실 따지고 보면 그냥 원점에서 빙글빙글 돈 것이나 다름없는데. 이제는 더할 것도 없다! 다 진짜 포기하고 머리 식히고자 pc방 출퇴근을 했다. 그동안 못했던 게임을 한 달 내 내 하면서 리그 오브 레전드 골드 티어를 처음으로 달성했다. 참 우스웠다. 이게 뭐라고, 목표했던 게임 등급을 달성한 게 일주일 내내 기분이 좋았다. 한 달쯤 더 지나고 어느 날 어두 컴컴한 피시방에서 나와 밝은 햇빛을 마주했을 때 그제야 다시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참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하게도 이대로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이제 다시 뭘 해야 하나 찾기 시작했다. 나라는 인간을 참 이해할 수 없었다. 난 안돼! 를 속으로 외치면서 동시에 뭘 할 생각은 꾸준히 한다는 게 멍청한 건지 살고 싶은 인간의 욕구인가 싶었다. 나는 다시금 나를 시험대에 올려놓았고 게임사에 입사한 한 친구의 말에 나는 게임사 입사에 도전하게 되었다. 


 돈이 슬슬 떨어져 가서 사무 계약직을 하면서 게임 분석 PPT를 만들고 산업 분석 글도 다시 썼다. 게임 시장에서 파이가 가장 큰 모바일 게임으로 시작했다. 총 3달을 스터디 카페에서 불안과 싸우며 머리를 짜내고 또 짜냈다. 첫 한 달은 게임하며 게임 시장을 공부했고 큰 회사에 지원했지만 빈곤한 콘텐츠와 허접한 PT 디자인은 어느 누구 구미를 당기지 못했다. 또 안되는구나 싶었지만 나도 공부가 덜되었다는 것을 면접을 보면서 깨달았다. 면접 탈락이 이어지자 한 일주일 좌절해있다가 다시 두 달 째는 여러 게임 말고 한 게임을 파고들어 게임 분석과 마케팅 분석을 해 다시 기업들에 한 번 쭉 돌렸다. 내가 정한 게임은 제2의 나라였고 기사란 기사는 다 찾아봤다. 게임 분석, 마케팅 분석까지 만들었는데 사실 BM분석까지 PT를 만들고 싶었지만 내 한계를 절감했다. 근데 중요한 사실은 PPT 때문에 나를 부르는 회사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PPT를 자세하게 보지는 않는데도 말이다.)



  새로운 PT로 자소서를 업데이트하자 면접 보는 횟수가 조금 더 늘었다. 물론 큰 회사는 아주 적고 다 작은 회사였지만 면접이라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정말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취업을 하게 되었다. 갑자기 이 글이 끝나는 느낌으로 말이다. 참으로 삶은 예측 불가능이다. 





(사진은 행복했던 일본 여행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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